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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보령 발전을 위한 기고 ~ 보령시장신문

♧문화재 지킴이 2013. 1. 7. 10:56
 

(기고)보령 발전을 위한 기고 ..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13-01-07 (월)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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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의 만세보령은 천운지기(天運地氣)시대 열려(2)
 
5백년 前 환황해권 중심시대 예측하며 동아시아 황금해안지대 예언
 
보령문화재지킴이 봉사단장 (熊溪) 임인식 書
 
계사년(癸巳年) 새해가 밝아 온지도 10여 일이 지나고, 2014년의 내년이면 대천(大川)이란 지명이 탄생된지 100주년을 맞게 되는 의미 있는 해가 된다.
 
그동안 보령을 중심으로 가장 큰 지리적 변화는, 역사와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는 자족적인 균형을 표방한 충청남도 도청이 내포문화권의 중심이라는 홍성군 홍북면과 예산군 삽교읍 일원으로 자리를 잡고 둥지를 튼 일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역사적 일은, 이미 동북아 중심의 환황해권 중심시대를 예견하고 미래형 신산업을 통해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고 보령의 연안지역에 묘소를 쓰게 된 토정 이지함을 알면 만세보령의 천운지기(天運地氣)는 추상적인 동경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단순히 우리는 토정 이지함을 생각하면 으레 떠올리는 것은 “토정비결”이다.
물론 유학을 비롯하여 도장사상, 천문, 지리, 산술. 등 온갖 학문에 뛰어난 재주를 가졌던 걸출한 인재로 알려져 있기도다 . 그러나 그 생애나 사상보다는 토정비결의 저자나 .풍수의 대가이며 기인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조명 하면은 보령의 엄청난 운(運)이 도래되었음을 확인하고 발견 할 수 있다 .
 
500년 전 시대적 상황에서 보면 돈키호테처럼 엉뚱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이지함은 드넓은 바다와 대지 속에 잠들어있는 모든 자원, 곧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을 재물의 창고로 보았다.
 
그리고 어느 나라든지 이 창고를 활짝 열어 백성들이 마음 놓고 쓰게 한다면 그 나라 백성들이 잘살게 된다고 보았다.
 
상업을 천시한 조선 사회에서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일찍부터 이를 실천에 옮긴 진정한 경세제민의 인물 이었던 것이다.
 
스승인 (화담) 서경덕조차 “그대의 학업과 수양은 이미 내가 가르칠 경지를 넘어섰다”고 말할 정도로 출생과 소년시절부터 남다른 성품과 혜안을 엿 볼 수 있다.
 
이지함은 1517년 (중종12년 )9월 20일 “오성지간의 만대영화지지” 오서산 자락인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에서 한산이씨 목은 이색의 6세손으로 아버지 이치와 어머니 광산김씨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나며 1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6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시묘살이를 하며 사람이 왜 태어나고 죽는가를 인근 성주사지에서 선(禪) 공부를 하게 되며 커다란 정신적 영향을 받는다.
 
시묘살이를 마친 후 큰형인 이지번(아계 이산해 아버지)이 외삼촌인 김극성 (중종반정의 공신 훗날 우의정)의 추천으로 노비를 관장하는 장예원 (掌隸院)에 일자리를 마련하자 한양으로 함께 이사 한다 .
 
나라사정의 시대적 배경은 당쟁과 사화가 극심하고 개국이후의 기득세력화 한 훈구파와 신진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사림파간의 끝이 없는 대결이 펼쳐지면서 조정의 벼슬아치 네명중 한명은 당시 유배를 당할 정도 이었다.
 
이런 한 역사를 얼굴을 마주보고 무릎을 맞대고 손을 부여잡고 잔을 부딪쳐야만 옛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을 아니다.
 
책장을 넘기면 시간을 넘어 그의 생각에 취할 수 있고 그의 한숨을 느낄 수 있고 그의 꿈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지금은 토정 이지함 선생이 살던 시대와는 다르다.
 
그러나 내포신도시의 도청시대와 환황해권 시대를 지향하며 500년 전 이 시대에 마포와 보령 일대에 거처를 두고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만들어 팔며 ,보령 앞바다 섬에 들어가 박을 심어 가을에 수확하여 팔게 하고, 황해의 여러 섬과 바다를 두루 돌아다니며 스스로를 바다의 광민(狂民) 이라고 하면서, 물길과 항해술을 배우며 제주도와 중국 등, 먼 바다를 다녔다는 기록도 전한다.
 
새로운 변화, 약속된 미래, 행복한 보령, 은 시민 모두의 꿈이며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최고의 학자이며 송자(宋子)라 까지 불린 우암 송시열 선생은 토정선생 유고집 발문에서 “내가 세상에 늦게 나서 토정선생의 문하에 쇄소(灑掃 물 뿌리고 청소 하는 것으로 제자(弟子)의 예절을 뜻함) 하지는 못했으나 선배와 장자(長者)들에게 그 풍성<風聲 ,풍도(風度)와 성망 (聲望)>과 사위(事爲 행한 일)를 듣고는 흠앙(欽仰)하고 사모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 적었고
 
임진왜란의 중봉(重峯) 조헌 선생이 제자이니 그 또한 학식을 증빙하며 율곡 이이선생은 “기화이초(奇花異草 기이한 꽃이며 기이한 풀)”에 비유 하였으니 이는 아무리 위대함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