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자식 용어의 유래 (由來) (첫번째 이야기)
보령문화재지킴이 熊溪 임 인 식 書
개자식 용어의 유래 (由來) (첫번째 이야기)
왕집신두왈견자 (王執腎頭曰犬子)
[들어가는 말 ]
(유독 보령에는 역사왜곡이 심해 할어버지.할머니 한테 듣던 호랑이 담배피던 이야기 아니고
사극에서도 듣도보도 못한 생생한 5부작을 연재하며 개(犬) 이야기로 부터 시작 합니다 )
우리는 흔히 역사 공부를 하며 많은 것이 왜곡(歪曲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거나 그릇되게 하다.)
되었음을 알지만 공부의 깊이가 얕다보니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전해온다 해도 오랜
시간동안 사실처럼 밑어온 일들을 종종 찾을 수가 있습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침략 야욕도 붙 태웠지만 우리 정신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많은 유언비와와 헛소문을 퍼뜨려 우리 전통의 민족문화 뿌리로 내려온 근본정신의 말살을
획책해 오고 몰지각한 역사학자들의 동조로 자연스럽게 민족정신과 우리의 민족혼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우둔(愚鈍)함을 보이게 된다. 지금은 이들의 후예들이 속된말로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앞장 을서 우리문화에 총질 하는격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역사기록은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처럼 정사와 [필원잡기(筆苑雜記)]같은
야사로 민중에서 끝없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수백 년을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지혜를 창출하며
그 가치는 서민의 애환과 희망으로 함께하며 민족혼(民族魂)으로 살아 숨 쉬어 전해왔다.
그러나 일본은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침략 하였지만 임진왜란(壬辰倭亂)등 민중(民衆 ,義僧兵)의 힘으로
전쟁에서 패한 경험이 다분하고 그래서 조선의 근기를 말살 하려고 갖은 구실로 못된 짖을 일삼는데
그중에서도우리정서를 끊으려 일제 강점기 퍼트린 말이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 하게 산다”!. 는
말을 생산하여 정치적으로 사회 환경이 혼란한 시기에 국민의 정신을 오도하기 위해 지어냈지만 오히려
지도층과 식자층들에서 앞장서 우리 정신보다도 물질을 내세워 이용하는데 앞잡이 노릇을 해온 사실들이다.
요즘은 한술 더 떠 퍽이나 유식한 체 하고 문화를 담당하는 곳에서 조차 스토리텔링이라고 호들갑을 떠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우리 좋은 옛날 이야기 가 스토리텔링 이라 하면 무엇이 바뀌는지 ... 허 허 허 ~·
선조들의 삶속에 녹아있는 시대별 상황에서 기발한 재취와 해학은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 민족의 혼과 맥박을 느끼게 하는묘한 본성의 여운이 작용 한다 .
정사(正史)로 보면 우리나라의 세계적 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은 5백년 역사를 방대한 분량으로
체계적인 왕실의 기록 문서로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책으로 1,893권 888책. 필사본·인본. 정족산본과 태백산본 등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으며. 그리고 1997년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그러나 야사(野史)에 전해 내려오는 재미난 옛날 이야기 중 성종(成宗) [조선 제9대 왕(재위 1469∼1494).
세종·세조의 치적을 기반으로 문화정책을 폈다. 숭유억불 정책을 철저히 시행했고 《경국대전》과 이를
보충한 《대전속록》을 간행했다.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는 성종 때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때 많은 역사 기록이 이처럼 정리가 되어 민담 또한 많은 구전으로 전해 오는데 성종은
부인이 12명이나 되고 자녀는 16남 12녀로 기록 되어 있고, 맏아들이 훗날 연산군이며 휘는 융()이다.
연산군은 즉위 3년 동안은 별 탈 없이 보냈으나, 1498년 훈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 삼아 김종직(金宗直) 등 많은 신진 사류(士類)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하였다.
이야기 시작은 성종(成宗)임금이 재직 시에 신하인 (점필재) 김종직과 하룻밤에 이러난 일들 중에 발생한다.
김종직(金宗直)과는 군신관계(君臣關係)를 초월하여 우정이 돈독한 친구 관계로 유지 했다고도 한다,
하루는 김종서가 입지승지(入直承旨)로 재직할 때 단둘이 있게 되는 기회가 있었다.
왕실에는 사초(史草)가 되는 왕의 움직임과 각종 기록을 위해 공적사항을 한사람의 승지만으로 기록하는
일은 감당할 수가 없으므로 승지(承旨)외에 주서(注書) 가주서(假注書)가 어울려 일을 맡는다.
정수 (定數)는 정3품(正三品)의 당상관(堂山官) 도승지(都承旨 대통령비서실장)좌승지,우승지,좌부승지,
우부승지,동부승지 ,각1인 정7품인 주서(注書) 2인(二人) 을 합하여 8명이 당직(堂直(入直))을 서는데
정수가감(定數加減)은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있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성종(成宗) 임금이 입직승지 김종직(金宗直)과 단둘이 마주보고 앉아 있다가
왕이 소변을 보게 된 것이다.
항용(恒用 늘.흔히) 임금이 용변을 볼 때는 사극을 보더라고 내명부(內命婦)의 상궁(尙宮),
내인(內人내시) 이 옥좌 밖에 대령하고 있다가 들어와서 왕에 용변을 보도록 돕는다.
특히 대변의 경우는 왕의 양팔을 들어 올려 가랑이 사이에 매화틀(梅花틀)을 들여 넣고 바지
골머리(허리춤)를 내리고 왕을 낮춰서 용변을 보게 한다.
매화틀(梅花틀)이란 요즘말로 하면 대변기(大便器)이다. 변기의 전우 좌우 벽에 매화문양(梅花紋樣)을
예술적으로 그려 양각을 하였기에 매화틀이라고 용어가 쓰였다,
“예쁜 손자가 똥 누고 매화타령을 한다”! 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 된다.
임금의 소변의 경우는 골마리(허리춤)를 내리고 요강(尿綱 소변통)을 대주면 된다.
이때 성종(成宗)이 요강을 가져대 대고 소변을 보려고 골마리(허리춤)를 내리고 손으로 “거시기”를
잡고 소변을 보며 옆을 흘겨다 보니 입직승지 김종직이 무엇인가 기록을 하고 있는데 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승지는 사관(史官)이라 역사를 기록하는 막중한 직분인데 왕의 언급이 없는데도 기록을
하고 있어) 받아 적을 말도 없을 텐데 언짢게 생각을 하며 사초(史草)를 흘겨다 보니 왕집신두(王執腎頭)
라고 넉자를 쓰고 있었다 .
그 글을 보고 문장에 능통한 성종은 에라이 “개 자 식” 이라고 승지를 놀려댔다.
이 말을 들은 입직승지 김종직은 늦을 세러 얼른 다시 왕집신두 옆에다 왈견자 (王執腎頭 曰犬子)
라 쓰는것이 아닌가!
우리말로 해석을하면 임금이 좇대가리를 잡고 말하면 개자식이 된다 . 하 하 하
王(임금왕)
執(잡을집)
腎(콩팥신)
頭(머리두)
曰(가로왈)
犬(개 견)
子(아들자)
주)이 이야기는 인터넷 검색에도 없는 최초의 이야기를 보령문화재지킴이 임인식이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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