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문화포럼

국체보상운동의 주역 김광제 독립지사 묘역 참배 (서해문화포럼 답사 4)

♧문화재 지킴이 2010. 4. 27. 10:18

 

                                 서해문화포럼 

춘계 보령지역 문화 유적답사 (3)

일시 : 2010년 4월25일 (일)9시부터~

장소 : 보령이 낳은 국체보상운동의 주역 김광제 독립지사 묘역 참배


[독립지사 김광제 선생 답사 요약]

천안의 유관순 .예산의 (매헌)윤봉길 .홍성의 (백야)김좌진 .서천의 (월남)이상재 선생등 충절의 고장답게 많은 호국역사 인물 중에 늦게 알려진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김광제 지사는 경주김씨 楊州牧使公 후예로 1866년 충남 보령시 웅천읍 평리 양촌에서 탄생하여 23세 되던 1888년 兵曹效力龍尉 副司勇 除授를 시작으로 宣略將軍龍尉 副司果,通訓大夫訓練院 僉正,通政大夫 秘書院丞,湖南視察使,東萊警務官 등을 역임하였으나 1905년 배일 및 내정의 부패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고군산도로 유배를 당하는 시련을 겼었으며 2개월후 특별사면되어 法部參事에 임명되었으나 불복하였다.

1906년 곧 바로 동지들의 주선으로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대구로 내려가 徐相燉 등과 廣文社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후 신문화를 받아 들여 열강에 대항하기 위한 만국공법 등 도서출판과 아울러 교육을 통한 세계열강의 침입을 막아 내려할 때 일제의 간계한 1,300만원의 국채를 불모로 하는 침략을 막아 내기 위하여 부사장 사상돈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발기 주도하였다. 각계 각층전국민의 자발적 참여와 전국 방방곡곡에 전파되어 궁중에 까지 이르고 광무황제의 칙어와 단연보상에 참여하는 거국적 국채보상운동으로 전개되어 2개월 만에 231만 989원을 모금하였으나 간악한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고 이어서 망국의 비운을 맞게 되었으나 이 운동을 통해서 다양한 국권회복운동으로 전개 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1906년 경술국치 이후 지사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지사는 만주로 망명하여 일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였고,1919년 3·1운동후 일본에 건너가 1920년 제2 3·1운동을 도모하고자 학생들과 함께 격문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발각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자강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나 일제에 의해서 강제해산된 후에는 대한협회에 가입하여 호남지방 시찰원으로 문화계몽을 통한 민족 자결운동으로 주권회복과 봉건질서의 타파로 선진문물수용을 통한 구국독립운동에 전력을 다하였다.노동운동을 통한 보다 강력한 구국운동으로 전환하여 조선노동대회 전국연합회장 및 경성본부장으로 전국 순회강연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1920년 6월 9일 마산에서 의문사로 서거하였다. 7년후 천리길 운구하여 고향인 웅천읍 평리에 안장하였다. 1990년 10월 26일 독립유공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국채보상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적인 행사로 대구에서 성대한 기념식이 있었고 독립기념관에서는 기념전시회 및 어록비 건립이 제막되었으며 방송매체를 통하여 전국적으로 홍보가 이루어졌으며 보령에도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에 활동을 하고있다..

▼사진제공 :김동안 사진작가 대천문화원 이사

자료제공 :독립지사 김광제기념사업회

(http://www.dongyangja.com/sub/about01.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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