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 구전설화의 의의와 활용
김헌선
1. 口碑・木碑・石碑・鐵碑・紙碑의 상관성
말로 전하는 핵심적 사건을 흔히 구비라고 한다. 구비는 말로 오래 전승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전적 정의가 있다. 이와 달리 사람들이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는 욕망의 소산이 바로 문자를 통한 기록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수단의 여하에 따라서 木碑・石碑・鐵碑・紙碑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나무에 새기거나 죽간에 새기는 것을 흔히 목비라고 한다. 이와 달리 돌에다 새기고 철에다 새기는 것은 달리 금석문이라고 하고 사연은 명문에 찬양은 시로 하는 특징이 있다. 금명문이 기록의 수단으로 되었다가 이를 종이로 새기는 일을 하였으니 그것이 지비이다. 지비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역사서이다.
그러므로 구비는 말로 전하는 것이고, 글로 전하는 것은 木碑・石碑・鐵碑・紙碑 등으로 구분된다. 대략을 가르면 구비와 기록비문이라고 한다면, 둘은 서로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진실한가? 둘 가운데 말로 전하는 것은 진실하지 않다고 할 수가 있으며, 오히려 일자무식꾼들이 전하는 것이므로 이는 적실하지 않은 것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다. 오히려 글로 남아 있는 것이 더욱 진실하며 역사적 진실성을 담보할 수가 있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지 의문이 생긴다.
말로 전하는 것은 핵심적인 내용을 전하는 것으로, 충격적인 사실을 민중들이 기억으로 선정하고 그 요체를 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를 더욱 신뢰할 수 있다. 구비가 아닌 이른 바 木碑・石碑・鐵碑・紙碑 등은 기록자의 관점에 의해서 대상을 왜곡하고, 다른 각도에서 이를 파편화해서 다루는 것이거나 이의 수단이 되는 나무・돌・철・종이 등이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희미해져서 판독이 불가능하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렇게 해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도 왜곡되고 진실은 자꾸만 달라져 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구비로 전하는 것은 어떠한 측면에서는 더욱 진실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구전이 있다면 문전이 있으며 구전과 문전을 상호보완적인 관계에서 생각해야만 진실에 더욱 가깝게 다가설 수가 있다. 구전과 문전에는 일정한 단계들이 있으며 이에 대한 연구를 정확하게 하려고 한다면 이에 대한 일정한 틀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한다. 이에 대한 연구의 전례는 여러 각도에서 찾을 수 있다. 길가메쉬서사시 전통을 논한 연구에서 이 점은 한 차례 중요한 논란을 야기한 바 있다.1)
구전과 문전의 상관성이 문제되는 자료가 바로 도미설화이다. 도미설화는 문전과 구전이 서로 전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이 자료에 대한 현지조사를 넓게 하고, 이에 관련된 연구를 차분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런 방편의 일환으로 도미설화의 구전자료를 소개하고 이를 문전의 자료와 견주면서 이 설화의 의의과 활용 방안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된다. 구전되는 자료가 넓게 연구되지 못했으므로 자료를 소개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지만 자료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살피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 논의의 일반화는 나중에 꾀하기로 한다.
2. 도미 구전설화의 내용 분석
도미구전설화는 여러 자료를 직접 채록한 것은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하는 학술답사에서 시행한 바를 중심으로 얻은 자료들이다.2) 이 자료조사는 일차는 1990년 10월 24일에서 27일까지 행한 현지조사에서 얻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시간적 겨를이 없어서 주요 제보자 조사를 하지 못했으므로 다시 김헌선이 혼자서 1991년 7월 26일에 재조사를 시행하였다. 이에 의한 자료에 의거해서 이 구전설화를 채록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 제보를 했던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1] 김종찬 (현지조사 당시 78세) : 1913년 11월 5일생으로 오천면의 미인도라는 섬에서 거주하는 분으로 오래도록 이 섬에 거주하였다. 다소 불편한 몸으로도 박문수전설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지명 전설을 구연해 주었다. 서당에 여러 해 다녔을 적에 선생님이나 학동들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구수하게 구연하였다. 주로 알고 있는 설화는 한시와 관련지은 김입(金笠)전설, 박문수설화, 오천면의 지명에 얽힌 전설 등이었다. 제1차 조사 시에 만난 가장 유능한 이야기꾼으로 1990년 10월 27일에 자택에서 구연하였다.
2] 신건철 (현지조사 당시 59세) : 1931년생으로 오천면 소성2리에 거주하는 분이다. 현지조사자가 신건철씨 댁에 거주하게 된 관계로 말문이 열려 서로 이야기를 구연하게 되었다. 오천면 일대의 지명 전설을 제공해 주었다. 지명 전설은 오천(鰲川), 도미항(都彌港), 상사봉(想思峰), 망채산(望採山) 등에 얽힌 것이다. 모두 어렸을 적에 동네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라고 했다. 1990년 10월 26일 자택에서 들었다.
3] 허준 (현지조사 당시 77세) : 1915년생으로 청소면 진죽리에 거주하시는 분이다. 이 제보자는 도미설화를 가장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해서 소개받았으나, 1차 조사 시에는 겨를을 얻지 못해서 현지조사를 못했으나 2차 조사 시에는 이 분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조사를 했다. 알고 있는 자료는 오천면 일대의 지면전설이 주로 많았고, 상당한 식견이 있어서 대천문화원의 향토조사위원으로 있다. 주로 구술한 이야기는 15세 무렵에 촌로들에게 들은 것이 많다고 했으며, 일찍이 황의돈(黃義敦)선생에게 공부한 바 있어서 향토사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되어 있다. 제공한 자료는 도미설화, 도독성전설, 전마평전설 등이다. 1991년 7월26일에 자택에서 조사했다.
세 제보자는 비교적 신뢰도가 높은 구연자들이었다. 토박이로 현장에서 자라났으며, 구비전승의 내용이 정확하고 이야기가 구비전승의 법칙에 맞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김종찬은 미인도에서 만난 제보자인데, 성격이 쾌활하고 조사자들을 반갑게 맞아주면서 자신이 전하는 이야기가 서당에서 들은 것이라고 하였다. 오천면의 지명전설에 근거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신건철은 오천항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를 한 점에서 의의를 둘 수 있는 정보를 다수 제공하였다. 허준은 학식이 풍부하고 견문이 넓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다양하게 전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많은 정보를 함유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주된 내용은 여러 가지가 섞여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보아야만 도미에 관한 전설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 전설은 우리가 아는 핵심적인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정확하게 전해주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 가닥이 서로 얽혀 있으므로 이 가닥들이 일관되게 연결했을 때에야 바람직한 특징을 구현할 수가 있다.
설화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주요한 것들이 정리된다. 이 정리에 입각해서 보면 이 도미전설의 진실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도미항(都彌港)>
ㆍ도미항은 이조 중엽 때에 유래한 것이다. 미인은 사회에서 물의가 되기 때문에 미인도에 귀향을 보냈다. 그래서 미인을 미인도에 건네 준데서 도미항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소성2리, 신건철담)
ㆍ도미항이라는 지명은 뿔재기 밑에 석곽이 있어서 석곽 밑에가 엄청나게 짚었다. 그런데 그 짚은 석곽 밑에 도미가 낚여서 도미를 가져가곤 했기 때문에 도미항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미인도, 김종찬담)
ㆍ도미항은 도미라는 목수가 있어서 도미라 했다. (청소면 진죽리, 허준담)
ㆍ참생골 북쪽 해변에 빙성(미인도 ; 인용자주)을 마주보고 마을이 있다. 예전 광천(廣川)포구로 큰 배가 드나들 때는 매우 번창하였으나 지금은 조용한 갯마을이며, 여기에는 도미라는 가련한 설화가 있다. (『내 고장 보령』, 328면)
도미항에 대한 전설에 도미가 나온다고 하는 것이 기본적인 특징이다. 도미는 시대마다 차이가 있으며, 구전설화에서는 이 도미라고 하는 인물이 일정하게 되어 있지 않다. 첫 번째 전설에서는 도미항에 관한 것으로 조선조에 유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도미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도미항에 관련되고, 미인을 건네준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도미항이라고 하는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하였다. 전설적인 진실성은 역사적 성격을 지니면서 변질되는 것이므로 이러한 전통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번째 전설은 한자식의 유래담과 달리 오히려 도미라고 하는 물고기의 유래담으로 둔갑하였다. 도미가 많이 낚이게 되었으므로 이곳을 도미항이라고 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증거를 대고 있다. 도미가 석곽 밑에서 많이 낚이므로 이러한 각도에서 지명유래담이 생기게 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설정이다.
세 번째 전설은 전혀 다른 유래담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도미라고 하는 목수가 있었으므로 이로부터 말미암은 특정한 인물이 바로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서 이 인물이 바로 목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이 전설의 내용이다. 도미라고 하는 주인공이 있으므로 이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적인 인물이 되어서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이 전설의 내용이다.
네 번째 전설은 중요한 내용이다. 미인도를 바라보고 있는 마음이 있고 이 마을에 주인공이 도미의 이야기가 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도미에 관한 전설이 여러 가지이지만 인물전설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바로 이 한 편이 있는 셈이다. 도미항에 관한 지명전설이 아니라, 다각도의 전설을 하나로 합쳐서 이 인물에 관련한 이야기를 압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전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전설은 전하는 제보자의 인식 여하에 따라서 전혀 다른 각도의 역사 인식을 드러낼 수 있으며, 동시에 전설의 특정한 사실이나 지명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고 다채로울수록 진실성을 가질 수가 있다고 판단된다. 도미항에 대한 다단한 인식의 편차가 오히려 깊은 공통점과 함께 차이점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된다. 전설의 다면적 인식이 도미와 얽혀 있다고 하는 점이 이 전설의 중요성을 증거하는 사례이다.
도미설화의 근거를 전설로 이해하는 것 가운데 도미항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도미전설로 파악하고자 하는 일단의 인식은 그러한 점에서 매우 소중한 역사 인식과 결부되어 있다. 이 전설의 중요한 대목은 다면적 인식으로 도미와 관련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미항에 그치지 않고 도미전설의 역사적 근거를 분명하게 하면서 지역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전설의 진실성과 역사적 근거는 이러한 각도에서 거듭 반추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 전설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전설의 요체를 간추려서 전한다.
<도미설화>
ㆍ전마뜰(戰馬坪)에서 군용마(軍用馬)를 기르고 백제왕 개로왕(蓋鹵王)이 자주 이곳에 순행을 하였는데, 왕이 이곳을 와서 들으니 「도미」라 하는 목수 한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 아내가 천하일색이란 말을 듣고 왕이 욕심이 나서 도미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도미를 불러 마굿간을 짓게 하고 기한을 짧게 정하여 왕명을 어겼다는 죄를 주어 도미의 두 눈을 빼고 포구에서 조각배에 태워 흘려보내고, 그 아내를 불러 수청을 들라 하니 그 아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신하된 자로서 한 목수를 생각하고 왕명을 거역하겠나이까 하고, 그러나 첩이 지금 월경 중이므로 삼사일 기한을 주면 몸을 깨끗이 목욕하고 대왕을 모시겠나이다 하거늘 왕이 기뻐하며 상을 후히 주고 집으로 돌려보냈더니, 그 아내가 집에 돌아와서 즉시 뒷산에 올라가 물길을 자세히 살피고 슬퍼 통곡한 후에 밤이 깊은 후에 빈 배를 타고 썰물에 한없이 흘러갔더니 어느 섬에 도착하였다. 아내가 배에서 내려 동리로 들어가 보니 장님거지 하나가 밥을 얻어먹는데 자세히 보니 그 남편 도미였다. 이에 반가이 맞아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이 사실로 해서 도미가 살던 포구를 도미, 그 뒤에 도미(都彌)라 해서 지금의 도미항이 되었고, 도미의 아내가 생장한 섬을 미인도라 하고, 도미의 아내가 올라가서 남편을 생각하고 슬피 울었다고 해서 상사봉이라 했다.
이 전설은 도미설화의 본질을 전하고 있는 핵심적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야기의 요체는 간결하다. 신분적인 상하관계에 있으며 남성의 신분적 지체에 의해서 여성의 정절이 시험되는 핵심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도미는 목수이고, 이와 달리 도미의 아내를 탐내는 쪽은 바로 왕이었다. 왕과 목수의 사이에서 정절이 바른 여성이 부각되어 있다.
이 전설은 전형적인 관탈민녀형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3) 관탈민녀형의 전설이라고 하는 것이 신분적 지체가 높은 인물이 지체가 낮은 인물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힘으로 상대방의 여성을 빼앗으려고 하는 권세가의 책략을 비판하는 설화가 이 이야기의 요점이다. 그러나 지체가 낮은 여성은 이에 굴하지 않고 그 인물에 대항하고 자신의 정열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한 대항의 주제이다.
이 전설은 상당 부분 전설적인 구성력을 가지고 있다. 도미가 건너간 항구라고 해서 도미항, 도미의 아내가 생장한 섬을 미인도, 도미의 아내가 남편을 생각하면서 울었다고 하는 상사봉 등이 바로 도미 전설의 중요한 근거들이다. 단순하게 생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전설적 근거물들이 있어서 이 이야기들이 구성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전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증거물이다. 허준이 전하는 이 이야기는 전설적인 증거물이 분명하고 실제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하는 증거물이 분명해서 이 이야기의 전설적인 증거물이 강력한 형편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전설적 증거물에 근거해서 본다면 이 이야기의 진실성은 선명하게 집약된다고 하겠다.
이와 함께 여러 가지 전설이 부대되어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역시 매우 중요한 전설이다. 이 전설 가운데 미인도・상사봉・전마뜰 등의 구전설화는 도미설화의 부대설화라고 하는 점에서도 소중한 기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전설을 통해서 보완자료를 삼을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이 전설의 중요한 면모를 확인할 수가 있다.
<미인도(美人島)>
ㆍ미인도는 일제시대에 미인도라는 이름을 잘못 알아 듣고 빙도(氷島)라고 했는데, 원래는 미인도라는 이름이 미인이 살았으나 나서 생장하면서 수를 오래하지 못했다고 해서 미인도라고 한다. (미인도, 김종찬담)
ㆍ미인도는 미인이 많이 났으나, 미인이 모두 박명해서 요절했다. (청소면 진죽리, 허준담)
ㆍ백제 때는 이 섬을 다고섬이라 불렀다 한다. 그 연유인즉 천북면 낙동리 빈섬 미인도라 불리어 왔으며, 현재는 빈섬이라 부르고 있다. 이 섬에서 미인이 많이 난다고 해서 미인도라 하였는데, 웬일인지 미인이 나면 성장하여 빛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지라 인근주민들은 이상히 여겨 오던 중 하루는 어느 도사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 이상함을 묻자 도사가 하는 말이 그런 이유가 있노라 하면서 “저기 저 다고섬에서 항상 북쪽을 향하여 배례하면서 이 미인도를 보고 미인을 나면 나를 다고라면서 우두커니 서 있으니 그럴 수밖에 있겠느냐”면서 저섬(다고섬)을 북배섬(北拜島)라 부르라 하니 그때부터 소성리 신촌지선에 있는 섬을 북배섬이라 부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그때부터 이 미인도에 미인이 나지 않아 빈섬이라 부르기 시작했다하나 그 사실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이 전설로써 내려오고 있다. (내고장 보령, 327~328면)
<상사봉(想思峰)>
ㆍ상사봉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 있는 달성 서씨들이 쳐다보면, 여자가 쪽두리를 쓰고 앉아 있는 형상을 했다. 쪽두리를 쓰고 부군을 쳐다보는 형상이다. 달성 서씨들이 이를 쳐다보면, 집안이 망하거나 바람이 나서 망하는 것이다. 상사봉은 이렇게 해서 죽은 산이라는 것이고, 6ㆍ25때에 이곳에 방공호를 판 뒤로 달성 서씨가 온전해졌다. (소성2리, 신건철담)
ㆍ상사봉은 봉우리가 서너 개가 있어서 상사봉이라 했다. 그곳에는 선림사라는 절이 있다. (미인도, 김종찬담)
<전마뜰(戰馬坪)>
ㆍ전마뜰은 전평, 전마평, 전마뜰이라 했는데, 옛날에 백제시대에 이곳에 나라말을 길렀으므로 이러한 지명이 생겼다. 말무덤이 여러 개가 있고, 길다랗게 생긴 무덤 터가 있다. (청소면 진죽리, 허준담)
미인도・상사봉・전마뜰 등에 대한 전설 역시 다각도로 전하고 있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고, 이 전설이 다른 전설과 서로 착종되거나 섞이면서 다른 이야기의 소중한 밑그림이 된다고 하는 점에서 이 세 가지 전설은 그 자체로 중요한 근거와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 전설적 증거물을 통해서 도미설화에 대한 보조적인 자료로 매우 소중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3. 도미설화의 구전과 문전 비교
도미에 관련된 전설은 여러 문헌 자료에 전하고 있다. 이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고 전설의 내용 역시 긴요한 증거이므로 이를 구성하는데 도움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도미전설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문헌에 전한다.
1] 『三國史記』列傳 都彌條
2] 『三綱行實圖』烈女篇
3] 『星州都氏族譜』
여러 기록에 이러한 이야기가 전하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고, 다양한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동일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풍부한 기록을 전하고 있으며, 최초의 기록이 되는 것은 바로 『三國史記』列傳 都彌條이다. 이 기록을 정리해서 보이면 다음과 같다.
都彌 百濟人也 雖編戶小民 而頗知義理 其妻美麗 亦有節行 爲時人所稱 蓋婁王聞之 召都彌與語曰 凡婦人之德 雖以貞潔爲先 若在幽昏無人之處 誘之以巧言 則能不動心者鮮矣乎 對曰 人之情不可測也 而若臣之妻者 雖死無貳者也 王欲試之 留都彌以事 使一近臣 假王衣服馬從 夜抵其家 使人先報王來 謂其婦曰 我久聞爾好 與都彌博得之 來日入爾爲宮人 自此後爾身吾所有也 遂將亂之 婦曰 國王無妄語 吾敢不順 請大王先入室 吾更衣乃進 退而雜飾一婢子薦之 王後知見欺 大怒 誣都彌以罪 矐其兩眸子 使人牽出之 置小船泛之河上 遂引其婦 强欲淫之 婦曰 今良人已失 單獨一身 不能自持 況爲王御 豈敢相違 今以月經 渾身汚穢 請俟他日薰浴而後來 王信而許之 婦便逃至江口 不能渡 呼天慟哭 忽見孤舟隨波而至 乘至泉城島 遇其夫未死 掘草根以喫 遂與同舟 至高句麗䔉山之下 麗人哀之 丐以衣食 遂苟活 終於羈旅4)(도미는 백제 사람이다. 비록 민간의 미천한 백성이지만 자못 의리를 알았으며, 그의 아내는 용모가 아름답고 또한 절개를 지키는 행실이 있어서 이 때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개루왕이 이 말을 듣고 도미를 불러와서 그에게 말했다. 개루왕이 이 말을 듣고 도미를 불러와서 그에게 말했다. “무릇 부인의 덕은 비록 절개가 굳고 결백한 것으로써 제일로 삼지만, 만약 으슥하고 컴컴한 사람이 없는 곳에서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로써 꾀인다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도미는 대답했다.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지만 제 아내만은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두 마음을 가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왕은 이를 시험하고자 하여 도미를 어떠한 일로써 머물러 두고 근신을 시켜 왕의 의복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밤에 도미의 집에 가게 했다. 사람을 시켜 먼저 왕이 왔다고 알리고는 도미의 부인에게 말했다. “내가 오래 전부터 네가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는데, 도미와 내기를 하여 너를 얻게 되었다. 내일 너를 맞아들여 궁녀로 삼게 되었으니 이후부터는 네 몸은 내 물건이 된다.” 드디어 간음하려고 하니, 부인은 말했다. “국왕께서는 거짓말이 없을 것이오니, 제가 어찌 감히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 먼저 방으로 들어가십시오. 저는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겠습니다.” 물러나와서 한 계집종을 단장시켜 왕을 모시게 했다. 개루왕은 후에 속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없는 죄를 씌워서 그의 두 눈동자를 빼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어 작은 배에 태워서 강 위로 띄워 보냈다. 그리고는 마침내 도미의 부인을 끌어들여 강제로 간음하려고 하니, 부인은 말했다. “지금 남편은 이미 없어졌으니, 홀몸으로 능히 스스로 살지 못합니다. 하물며 왕을 모시게 되었는데 어찌 감히 명령을 어기겠습니까? 지금은 월경으로 온몸이 더러워져 있으니 다른 날에 깨끗이 목욕을 한 후에 오겠습니다.” 왕은 그 말을 믿고 이를 허락했다. 부인은 곧 도망하여 강 어귀에 이르렀으나, 건너지 못해서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으며 통곡하니, 갑자기 외로이 떠 있던 배가 물결을 따라 이르렀다. 이를 타고 천성도에 이르러 그 남편을 만났는데,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으므로 풀뿌리를 캐어 먹었다. 드디어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 밑에 이르니, 고구려 사람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옷과 밥을 주었다. 마침내 겨우 살게 되어 객지에서 평생을 마쳤다.]
『三國史記』의 구성 상 일반 백성이 열전에 오른 것은 이례적인 일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 서술에 왕과 신화가 중심이 되던 단계에서 백성이 서술에 올랐다고 하는 일이 이례적인데, 유가적인 관점에서 높이 내세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해서 이 도미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유가적 관점의 이념 선택으로 서술의 대상이 된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충남 보령군 오천면 일대에 전해지는 이야기의 중요한 자료로 도미설화의 현장을 택했으나, 문헌자료와 구전자료는 실상 내용에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구전설화와 차이가 있으며 동일한 이야기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전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가장 쟁점이 되는 대목을 보면서 이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쟁점과 이견이 많은 곳이 바로 천성도(泉城島)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는가가 쟁점이 된다. 천성도는 이 전설의 이해에 핵심적인 관건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본다면 문전과 구전에 있어서 결정적인 쟁점이 얽혀 있다. 가령 이 섬의 위치를 두고 구전과 문전에서는 서로 다르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미가 구체적으로 머문 곳인 섬의 위치를 놓고 몇 가지 차이점이 있으니 이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ㆍ천성도(泉城島)
ㄱ) 한강 하류에 있다. (성주도씨 경모록)
ㄴ) 충남 보령군 웅천면에 있다. (성주도씨 족보)
ㄷ) 충남 보령군 오천면 원산도이다. (현지 구전)
도미설화의 현장이 도대체 어디인가는 지금으로서는 단정지을 수 없다. 다만 여러 가지 현지 구전자료에 의하건대 정황으로 미루어 ㄷ)을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증거물이 보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허준의 이야기 구성이 이를 입증한다. 세 곳 가운데 진실은 어느 곳에 있는지 확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천성도에 대한 논란은 그 자체로도 소중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구전과 문전의 상이한 결과물이므로 이 점 역시 논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느 것에도 현재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두 가지 증언의 일치점을 찾을 수가 있다. 하나는 성주도씨족보와 현지 구전의 일치점이라고 하겠다. 대체로 서로 근접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서 이들 사이의 진실성을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장차 이에 대한 논란은 불식되어야 하고 소중한 자산으로 기여해야 한다.
4. 도미설화의 활용
도미설화는 지역적 근거를 명확하게 지닌 인물전설이자 지명유래전설임이 확인된다. 이 전설이 진정한 가치를 가지도록 하고자 한다면, 전설에 대한 광범위한 수집과 재정리가 필요하다. 문헌자료에 대한 다양한 정리가 있어야 하고, 아울러서 더욱 정밀한 해석도 필요하다. 전설의 구성으로 본다면 나루, 머물렀다고 하는 섬, 기타에 해당하는 전설 등이 다각도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도미설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다. 다양한 원천을 활용하고 조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긴요한 작업의 수순이 될 것이다.
필자의 현지 조사에 의거한 체험을 통해서 본다면, 도미항・원산도・미인도・상사봉 등에 대한 일련의 현지 체험은 매우 중요한 근거와 원천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원천을 통해서 도미설화를 활용하고 이를 평가하는 것이 소중한 과제로 된다. 전설적 진실성은 역사적 기록과 일정한 거리를 가지게 되는데 이를 통해서 민중들이나 특정한 기억의 전승 숙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선택할 수 있으므로 이를 소중하게 전하는 것이라고 본다.
상사봉에서 굽어보는 오천 일대의 풍광이나 도미항 등의 풍광은 절경을 자랑하고 있다. 이 점에서 도미전설은 일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으며, 이 전통을 살려서 이를 현대적으로 적극적으로 되살리는 길은 매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설은 다면적 속성에 근거하지만 동시에 일관된 해석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이 점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해야 한다.
활용의 핵심은 문화적 컨텐츠로 만드는 방식이 가장 적절하다고 하겠다. 이 컨텐츠야말로 소중한 전통에 대한 재인식에 근거할 수가 있으므로 이는 적절한 가능성을 갖추고 있는 좋은 대상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자료는 그러한 가치와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으며, 그러한 가능성에 입각한 다면적 활용과 모색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활용은 풍부하고 다양한 표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1) Thorkild Jacobsen, The Treasures of Darkness:-A History of Mesopotamian Religion-, Yale University Press, 1978, p.210 이 책에서 대략 B.C. 2600년부터 B.C. 500년까지 전승된 길가메쉬의 판본을 비교 검토하면서 이에 대한 일정한 literary stemma를 연구하였다. 구전과 문전이 서로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상관성을 연구한 본보기로 의의를 삼을 수 있는 연구 업적이다.
2) 그에 관련한 자료는 다음과 같은 저작에 수록되어 있다.『경기어문학』(東牛 鄭台永敎授停年退任紀念特輯號) 제9집,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991, 511-548면.
3) 최래옥, 관탈민녀형설화 연구, 『성산장덕순선생화갑기념논총』, 동화문화사, 1982.
4) 『三國史記』列傳 卷第四十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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