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8 호

탑의 주인을 아시나요?

♧문화재 지킴이 2010. 8. 19. 11:38

 

            탑의 주인을 아시나요?

 

 

 

 

 

 

인천시-충남 보령시간 탑동 3층석탑 이전 요구 놓고 갈등

| 기사입력 2008-07-29 15:42

  

 

 

【인천=뉴시스】


인천시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 인천으로 옮겨진 충남 보령 탑동 3층석탑을 놓고 최근 충남 보령시가 본래 위치했던 보령시로의 이전을 요구하고 나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같은 상황에서 인천시의회는 충남 보령시가 요구한 보령 탑동 3층석탑에 대한 보령시 이전은 타당한 것이라며 9월 개원되는 임시회에 청원으로 채택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이에 대한 시 대응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29일 인천시에 따르면 충남 보령시는 시와 시의회에 '충남 보령 탑동 3층석탑 이전 요구'의 공문서를 통해 지난 1910년 중반 일제 강점기 때 인천으로 불법 이전된 3층 석탑의 문화재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보령시는 공문을 통해 당시 일본인에 의해 인천으로 이전된 석탑은 불법으로 반출된 것이며 현재 인천시립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전시된 탑동 3층석탑 안내기에도 원소재지가 충남 대천시 대곡동으로 기록돼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보령시는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된 석탑에는 지석대가 없다고 지적하고 그 이유는 지석대가 커다란 바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밀반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보령시는 이어 현재 탑동마을에는 3층석탑이 세워졌던 큰 바위의 지석대가 있다며 문화재 원형 복원을 위해 3층 석탑의 이전을 촉구했다.


보령시는 그러나 인천시가 탑동 3층석탑의 이전이 어려울 경우 보령시에 장기영구임대방식으로 대여 할 수 있도록 행정조치를 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보령시는 이같은 조치가 이루어질 경우 현재 시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3층석탑 원형을 복제해 전시할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인천시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이 매입해 인천으로 이전한 뒤 세계 2차대전 때 패망과 함께 인천에 남겨진 3층석탑은 선의로 취득된 재산이기 때문에 돌려줄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인천시는 또 탑동 3층석탑 이전에 관한 보령시의 요구는 지난 1995년 시의회 청원으로 제기됐지만 탑동 3층석탑이 보령시 소유라는 명백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된 사안이라며 보령시 요구는 다소 무리하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인천시는 설령 3층석탑의 원래 위치가 보령시 지역이라해도 그동안 시 문화재로 지정돼 관리돼 온 만큼 시 소유 재산이라며 3층 석탑 이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박창규 인천시의원은 "문화재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본래에 있던 위치에 문화재가 있어야 한다"며 "인천시가 프랑스로부터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를 반환받은 것처럼 3층 석탑도 보령에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시 관계자는 "그동안 인천시 문화재로 지정돼 꾸준히 관리돼 온 3층석탑을 보령에 돌려준다는 것은 어렵다"며 "다양한 계층의 전문가들과 협의해 최종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영수기자 ysl0108@newsis.com

 

 

인천시의회, '3층석탑' 보령 반환 거부

'보령에서 반출' 증거 부족 등 내세워...2차 청원도 부결

2008년 12월 23일 (화) 17:01:14 이상우 기자 sowhy@dtnews24.com

   
인천시립박물관 옥외전시실에 보관중인 '3층석탑'.
인천시의회가 최근 '충남 보령 탑동 3층 석탑 이전 청원'을 부결시킴으로써 이 석탑을 둘러싼 인천시와 보령시의 갈등이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인천시립박물관 옥외 전시실에 보관돼 있는 이 석탑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봐서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보령시는 일제강점기 당시 보령시 남곡동(옛 지명 탑동)에서 불법으로 반출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문화재 수난사'(이구열 지음, 1996년)에 의하면, 1910년대 중엽, 당시 인천부회(지금의 시의회) 의원이던 일본인 '고노'가 보령시 남곡동의 절터에서 5층 석탑을 사들여 인천에 있는 자신의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의해 보령군수가 조사한 결과 석탑 매입이 불법으로 판정받았으나 이를 반환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재인천보령향우회와 보령시 등에서는 이같은 기록과 남곡동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3층 석탑이 보령에서 불법으로 반출된 석탑으로 보고 이 석탑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재인천보령향우회를 중심으로 지난 2001년 3월에 이어 지난 7월 두번째로 인천시의회에 석탑 이전 청원을 제기했으나, 인천시의회가 이를 다시 거부한 것.

인천시의회는 시립박물관의 3층 석탑이 보령시 탑동에서 불법 반출됐다는 증거가 부족하며, 아직 국내에서도 이런 이유로 문화재를 반환한 사례가 없고, 이미 인천시민의 문화유산이 된 점 등을 들어 이 청원을 부결시켰다.

인천시의회는 남곡동 현지를 방문해 석탑의 원래 위치를 확인하려는 등 나름대로 성의(?)도 보였으나,  오히려, 현지조사 과정에서 인천시가 제기한 의문점에 대해 보령시가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져 보령시의 준비부족도 반환이 무산된 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한국문화재 수난사'에 기록된 남곡동 석탑은 5층으로 기록돼 있으나, 인천시립박물관의 석탑은 현재 2층 기단부와 1층 탑신 및 1.2.3층의 옥개석 그리고 복발부분만 남아있는 '3층 석탑'이고, 석탑의 일부 재질도 서로 다른 것으로 확인돼 이에 대한 연구도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보령시는 석탑 반환을 거부하는 인천시의 강경한 입장에다 이 석탑이 보령에서 불법 반출됐다는 근거를 확보해야 하는 난제까지 안게 됐다.

 

 

 

 

              

 

                      

     

                                                  탑동삼층석탑 ( 塔洞三層石塔 영문명칭 : The Stone Pagoda of Tapdong)

 

 

언제 찍은 사진인지는 정확히는 알수 없지만  자료를 훓어보니 적어도 90 년도 이전임은 확실하다.

 

  신포동에 소재한 제1공보관 (제2공보관은 부평에 있었음) 앞에 있었던 3층석탑으로

  정식명칭은  탑동삼층석탑 ( 塔洞三層石塔 영문명칭 : The Stone Pagoda of Tapdong)이다.

 

   작년 7월 보령시와 의회에서에서 인천시측에 저 3층석탑이  자기네 문화재 라고 반환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기실은 이전에도  반환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인천시에서는 역사적 가치가 별로 없다고 하면서도, 

  전혀 반환의사가 없다는 기본입장을 사수 하고자 하였다.

  문화재라는것은 그 민족의 혼과 생활이 배어져 나온 귀중한 자산으로 나와 같은 보통사람들은

  그 소유여부에 대하여 왈가왈부 할 것은 아니로되,

 

  실리와 명분이 타당할것 같으면  대의적인 입장에서 임대방식으로

  보령시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도 괜찮으리라 판단된다. 어차피  대한민국 안에 있을거니까..

 

  하지만  인천시 의회에서 보령시의 의견을 들어보기 위한 남곡동 현지 조사장소에서

  보령시 측은 준비안된 성의없는 답변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니, 

  남의 땅에 자리한 물건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려면 

  주장하기에  앞서 그에 걸맞는 준비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된다. 

 

  이 후 상황이 어떤지는 알 수없지만  자료글을 보건대 꼭 보령의 것이라고 주장 하기만은 힘 들것

  으로 보인다.(지극히 개인적인 사견임을 밝힌다.)

 

   공보관 앞에 있을때에도.. 시립박물관앞에  존재하고 있는 현 시점에도

  저 석탑의 존재와 명칭을 알고 있는

  인천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인천사람 보령사람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가적인 문화재는 물론이거니와  지방지정 의 작은 문화재도

  소중한 마음으로 관심을 갖고  정확히 알아 두며 보존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석탑뒤의 " 인천시공보관 " 이라는 건물의 이름도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이제는 어린이집으로 바뀌어 인천의 미래를 짊어갈 동량들을 키우고 있다..

 

   이 사진은 중구청 구정홍보용 자료중의 한 컷으로  공보관으로 재임시절

   업무수첩의 한 귀퉁이에 숨어 있던 사진이다.

   왜 이 사진을 수첩속에 넣어 두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새삼 기록의 중요성이 대두 되는 한 예이다.

 

 

         

                                  **    자료글 (국가지식포털에서 일부 인용)    **

 

탑동삼층석탑
유물명칭 : 탑동삼층석탑
국적/시대 : 한국(韓國) / 고려(高麗)
재질 : 석(石) / 화강암(花崗岩)
크기 : 높이 : 230 cm / 너비 : 200 cm
용도/기능 : 종교신앙(宗敎信仰) / 불교(佛敎) / 예배(禮拜) / 탑(塔)
출토(소)지 : 충청남도(忠淸南道) 보령시(保寧市)
소장기관 : 공립(公立) / 인천시립(인천시립)
유물번호 : 인천시립(인천시립) 1264

석탑의 조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엽의 것으로 보이며, 전체적인 비례로 보아 원래 이층기단의 3층석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기단부의 이층 기단부와 1층의 탑신 및 1,2,3층의 옥개석 그리고 복발이 남아있다.

원래는 송학장(중구 송학동 구 시장관사)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66년 인천공보관으로 이전 복원하였다가 1990년 박물관 이전과 함께 이관된 것이다.

1916년 인천부의원이었던 일본인 고노(河野竹之助)가 충남 보령으로 부터 반입하여 정원석으로 사용하였다는 설도 전하지만 확실한 근거자료가 없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석탑은 여러 석탑의 부재를 한데 모아서 복원한 것으로 추정되어 그 출토지를 밝히기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신라 석탑의 전형양식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대체로 기단과 탑신은 신라 석탑에 비하여 폭이 좁아지고 탑신은 층수가 많아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 안정감이 있다면 고려시대의 석탑은 늘씬한 감이 있다. 또 어떤 탑은 탑신 밑에 별도의 판석을 삽입하기도 하고, 어떤 탑은 기단 위아래로 연꽃무늬를 돌려 마치 불상대좌와 같은 모습을 이루기도 한다. 또 지붕은 두껍고 처마가 네 귀에서 위아래가 모두 곡면으로 들리며 일부의 탑에서는 기단도 단층으로 생략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의 석탑은 전성기 신라 석탑이 보여주는 당당한 느낌은 줄어들고 기단이 좁아 안정감이 적은 반면 탑신의 층수가 많아 하늘로 치솟는 느낌을 준다. 대표적인 석탑으로는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 국립중앙박물관의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과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그리고 경천사 십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사찰의 조영과 불탑의 건립에 토착 세력의 참여도 높아져서 고려 사회의 새로운 성격이 부각되는 10세기 후반부터는 석탑에서도 새로운 조형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첫째로 고려시대 석탑은 지방적인 양식을 현저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영남 지방에서는 신라식의 석탑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반면, 옛 백제 지역에서는 백제식의 석탑이 일부 부활되고 있다. 또한 개성을 중심으로 한강 이북 지방에서는 다각다층석탑이 성행했다. 이러한 지방 양식의 석탑이 조성된 배경은 뚜렷이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각 지방에 남아 있던 과거의 명탑들이 지방 양식의 모델로 자리잡아 영향을 미치거나, 토착 세력의 부각에 따라 복고풍 석탑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나면서 백제식의 석탑과 고구려식의 다각다층탑의 재현을 불러 일으켰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둘째로 다양한 갈래의 이형석탑이 고려시대에도 조성되는데 그 중에는로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이 탑은 고려 말기인 충목왕 4년 (1348년)에 세워진 것으로 평면이 사면돌출형인 기단을 3단으로 쌓고, 탑신은 3층까지는 사면돌출형을 유지하다가 4층부터는 사각형으로 올렸으며, 상륜부는 사면석주형으로 마감하고 있다. 백색 대리석을 재료로 하여 기단으로부터 탑의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온통 불보살, 신중, 운룡, 초화, 동물 등을 표면에 새겨 넣고 탑신에는 층마다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지붕은 목조 건물의 온갖 부재를 세밀하고도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아예 탑 전체가 목조 건물을 방불케 하며 석탑이면서도 대작의 세련되고 화려한 석조 공예품을 대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인데, 이 석탑 또한 고려시대 석탑 장엄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본 유물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엽의 것으로 추측된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현재는 기단부의 상대중석, 상대갑석 및 1층의 탑신과 1, 2, 3층의 옥개석, 복발이 남아있는데 원래는 이층기단의 3층이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신라의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의 전통을 이은 석탑, 새로운 소재를 사용한 석탑, 탑신의 층층 마다 괴임돌을 삽입한 석탑, 탑신 전체에 불보살상이나 여러 가지 무늬를 새긴 석탑, 상륜부가 특이한 조형을 보여주는 석탑 등이 주목된다. 그리고 특히 고려 말기에 들어서는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경복궁의 경천사 십층석탑 등의 경우처럼 상륜부가 이국적인 스타일의 석탑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화순 운주사에는 한 사찰에 수십 기의 석탑이 조성되는 가운데 생소한 무늬와 역시 생소한 탑신부를 쌓아 올린 탑들도 세워져 매우 특수한 예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