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8 호

[스크랩] 굴산사지 掘山寺址

♧문화재 지킴이 2010. 1. 31. 08:59


                                                                  굴산사지 掘山寺址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邱井面 학산리鶴山里 597번지 일대에 있었던 신라 굴산사의 절터.

사적 448호


굴산사는 신라新羅 하대下代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본산으로 알려진 선종禪宗의 대찰大刹이었으나,

현재는 조그마한 절터로 변했다.

847년(신라 문성왕 9)에 범일국사梵日國師(810-889)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부도浮屠, 당간지주幢竿支柱, 굴산사지석불좌상掘山寺址石佛坐像 등,

남아 있는 유적으로 보아 상당히 큰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 사찰의 유구遺構로 보이는 여러 개의 초석이 경작지에서 드러났으나,

조각 수법이 정교한 초석 1개는 창건 당시의 것은 아닌 신라 말이나 고려 초 조성으로 추정된다


굴산사지부도 掘山寺址浮屠 : 보물 제85호

굴산사를 창건한 범일국사梵日國師의 사리탑이다.

 

굴산사터의 위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모든 부재가 8각으로 조성되는 기본형을 따르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변형된 수법이 보이는 탑이다.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부분인 기단基壇이고,

위는 머리장식이 놓이는데 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인 보주寶珠가 얹혀있다.

바닥돌은 8각의 평면으로 중앙에 높은 굽을 돌출시킨 독특한 모양이며, 반원형의 돌을 괴고 있는데 흡사 그릇 모양이다.

그 위로 8개의 기둥을 세워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천상(天上)의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과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새기고 있다.

 

 

마지막으로 연꽃모양의 반원형 돌을 얹었다.

8각의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이루어지는데 몸돌은 낮고 지붕돌의 경사는 급하다.

지붕선은 뚜렷하나 처마끝에서의 치켜올림이 없어 밋밋하다.

전체적으로 위축된 느낌을 주는데 기단 일부에서는 8각이 아닌 원형의 일부를 도입한 흔적이 보인다.

몸돌이 지나치게 작고 낮음에 비해 지붕돌은 너무 크고 무거워 균형을 잃고 있다.

                                                  @ 기단의 동물문양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범일국사가 입적한 시기(888)에 조성되었다고 전해지나,

탑의 구조나 조각수법 등으로 미루어 이보다 늦은 시기인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굴산사지당간지주 掘山寺址幢竿支柱 : 보물 제86호

신라 문성왕文聖王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굴산사의 옛터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당간지주이다.

 

굴산사는 범일국사가 당나라 유학시 왼쪽 귀가 떨어진 승려가 고향에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는 청으로 지은 사찰이라고 한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지주는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말한다.

사찰앞에 세워지며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당간지주는 현재 밑부분이 묻혀 있어 지주사이의 깃대받침이나 기단基壇 등의 구조를 확인할 수가 없다.

두 지주의 4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밑면에는 돌을 다룰 때 생긴 거친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깃대를 고정시켰던 구멍은 상·하 두 군데에 있고, 정상은 끝이 뾰족한 형상이며, 남쪽 지주의 끝부분은 약간 파손되었다.

전반적으로 소박하나 규모가 거대하여 웅장한 조형미를 보인다.


굴산사지석불좌상 掘山寺址石佛坐像 : 강원문화재자료 제38호

굴산사 절터에 있는 석불좌상이다.

이 곳에 전해지는 3구의 석불 가운데 완전한 2구는 작은 암자에서 모시고 있고, 머리 부분이 없어진 1구는 우물에 있다.

석불 3구는 모두 한손이 다른 손의 검지를 감싸고 있는 손모양[智拳印]을 하고 있는데,

이는 비로자나불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모습으로 아마도 함께 모시기 위해 만든 비로자나삼존불로 생각된다.  

 

얼굴은 둥글고 긴 타원형이며, 어깨는 움츠린 듯하다.

옷의 표현이 두꺼워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으며,

가슴 부근에 있는 손의 모습은 다소 경직되어 보인다.

이러한 불상은 월정사月精寺 석조보살상石造菩薩像에 비해 다소 연대年代가 떨어지지만

둥글고 긴 안면 골격과 평판적인 신체에 추상적인 표현과는 달리 곡선적인 조각彫刻을 한 점은

고려高麗 초기初期인 11세기 작품으로 자연주의自然主義 양식계열로 지방地方 조각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이곳은 신라시대新羅時代에 명주溟州라고 불리던 곳으로 강릉江陵 한송사지寒松寺址 보살상菩薩像, 신복사지神福寺址 보살상과 더불어

동일지역 내에 제작된 고려시대高麗時代 불교조각佛敎彫刻의 첫 장을 여는 중요한 작품이다.

 

굴산사지 석천 掘山寺址石泉 :

옛날 학산이라는 이 마을에 양가집 처녀가 있었는데,

하루는 석천 우물이라는 이 우물 물을 길러가서 바가지에 물을 뜨니 해가 바가지에 담기는 것이었다.

물을 쏟아내고 다시 뜨기를 반복했는데 이상하게 바가지에 해가 떠 있는 것이었다.

그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신 뒤 처녀는 배가 불러오고 14개월 만에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았기에 수치로 여겨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인근 학바위에 버렸다.

며칠 후에 어미가 학바위를 찾았는데

백학이 날아와 날개로 아이를 덮어주고 새벽이 되자 아이 입에다 붉은 열매 같은 것을 넣어 주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를 보고 범상치 않은 아이라 여겨 데려와 기르게 되었다.

그후 아이는 출가하여 승가 최고의 위치인 국사라는 칭호로 불리었고, 학산에 돌아와 굴산사를 열었다.

바로 그 아이가 바로 범일국사라고 전한다 

                                                                                                      - 출처 : <삼국유사 조당집>과 <임영지> 등 강릉지역 향토지   

 

 

                                                     @ 우물에 있는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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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근의 문화재  

 

한송사지석불상寒松寺址石佛像 : 보물 제81호

강원 강릉시 죽헌동 177-4 강릉시립박물관

강릉에 있던 한송사가 폐사된 후 명주군 구정면 어단리에 있던 것을 보물로 지정하면서 1992년 강릉시립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머리와 오른팔이 없어진 불완전한 보살상이지만, 입체감이 풍부하고 매우 활달한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희귀한 작품이다.

왼팔은 안으로 꺾어 왼다리에 얹었으며, 오른팔도 역시 그렇게 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없어져서 알 수 없다.

앉은 자세는 왼다리가 안으로 들어가고, 오른다리를 밖으로 내어 발을 그냥 바닥에 놓고 있다.

이런 자세는 보살상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아마 어느 본존불을 모시던 협시보살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친 천의天衣는 아주 가벼운 느낌을 주며, 목걸이도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어 아름답다.

이 보살상은 특이한 자세와 더불어 사실적이며 활달한 조각수법으로 특이할 만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한송사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과 조각수법이 흡사한 고려시대의 우수한 작품이다.

                                                                      @ 인터넷에서 퍼온 사진임


신복사지석불좌상 神福寺址石佛坐像 : 보물 제84호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신복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년)에 범일국사가 처음 세웠다.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 제87호)을 향하여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보살상을 표현하였는데,

왼쪽 다리를 세우고 오른쪽 다리를 꿇어앉은 자세를 하고 있으며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원통형의 높다란 관冠을 쓰고 있는 얼굴은 풍만한데다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어 복스럽게 보인다.

관 밑으로 드러난 머리카락은 어깨너머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양 어깨에서부터 걸쳐 내져진 옷자락은 몸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보살상의 사실성을 더해준다.

팔찌, 목걸이, 옷주름은 굵은 띠처럼 묘사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둥글고 둔중한 조각수법을 보인다.

이러한 자세나 조각 솜씨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앞의 공양보살상과 유사한 것으로 같은 지방 계열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보살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윗면을 둥글게 하여 보살이 들어앉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바깥쪽에는 큼직큼직하게 2겹의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규칙적인 간격의 옷주름과 단순해진 장신구, 대좌의 조각수법 등에서 화려한 신라적 요소가 사라지고 고려 초기의 둔화된 표현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











출처 : 바람꽃과 솔나리
글쓴이 : ma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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