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령의 영원한 수호신 도만호 김성우장군 유적 답사
고려말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신 김성우 장군이 있기에 우리지역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주민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그분의 업적을 익히 알 수 있습니다. 소양리, 어항, 해수욕장, 주포 등 장군의 업적이 비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모일가의 박물관, 기록보존소, 향토문화원 등을 전진하면서 각고의 노력끝에 그 분의 업적이 빛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뜻을 같이하여 도만호 장군의 업적을 기리시기 바랍니다.
『신안현지(新安縣誌)(1412년 태종 13년)『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등등
아래 글은 김영모 교수가 보령시 홈페이에 기재한 내용입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과 동시에 순절한 고려충신 김성우 장군이 처음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은 오늘날의 보령지역을 기술하고 있는 현존하는 최초의 서책인 『신안현지(新安縣誌)』(1412년 태종 13년)이다. 이 서책의 ‘인물’편의 맨 첫 머리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김성우 장군이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都萬戶招討事奉命討倭倭寇巢窟公盡滅亡戰時自來故峯曰玉馬寶劍自出故洞稱飛刀洗軍入海門而有軍入浦之名伏兵花厓而有伏兵坪石浦卸冠故有冠巖賊屍屯蟻故有蟻坪(장군께서 도만호초토사로 왜구를 토벌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받았다. 장군께서 왜구의 오랜 소굴이었던 이 지역 왜구를 소탕하였다.전시에 신마가 튀어나온 산은 옥마산이다. 보검이 절로 나왔으므로 동리의 이름이 비도세이다. 군사가 바다의 문으로 들어온 곳으로 군두리(현재의 어항) 포구라 부른다. 군사를 화애언덕에 매복시켰다 해서 복병펄(복병리)이 되었다. 장군께서 갓을 벗어 놓았던 곳이라 갓바위이다. 장군께서 무찌른 적의 시체에 개미가 모여들어 개미펄(청라 의평리)이라 한다.)
아울러 다음의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에서도 김성우 장군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高麗 金成雨 光州人 侍中周鼎之曾孫版圖判書允藏之子 麗末以都萬戶 招討事奉命 討倭 師過保寧時 保寧 久爲倭寇巢穴 公盡 剿滅之戰時神馬自來故峯 稱玉馬 寶劍自出 故洞稱飛刀 軍入海門而 有軍入浦之名 伏兵花厓而有伏兵坪之號 浦石 卸冠故 有冠巖 賊屍 屯蟻故 有蟻坪至今 人誦爲異蹟公樂其土 家于靑蘿 故 子孫 世人以爲玆土之主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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