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최치원 선생

[스크랩] 천부경

♧문화재 지킴이 2009. 10. 8. 21:37

세 고전자(古篆字本)에 대한 비교분석

- 신지의 녹도문 천부경을 중심으로 -

 

이찬구(고대사 연구가)

 

1 . 천부경에 대한 일반적 인식

 

오늘날 천부경에 대하여는 대개 이렇게 인식되고 있다.

① 천부경은 환인천제께서 다스리던 환국(桓國)에 있었던 구전(口傳)의 서(書)이다. 그 후 환웅께서 천강하신 후 신지혁덕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으로써 그것을 썼다. 훗날 최고운(崔孤雲)이 전고비(篆古碑)를 보고 갱부작첩하여 세상에 전하였다. 《이맥 『태백일사(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편)》

 

② 전비문(篆碑文)이 몹시 어렵고 읽기가 힘들어서 고운이 그것을 번역하였다. 』『고운집(孤雲集 )』 「사적 본(史蹟本)

③ 법수교(法首橋) 비문(碑文)은 평양 법수교의 비(碑)에 새겨진 글월로 훈민정음 이전에 있었던 우리나라 고대문자로 추측된다.《이홍식, 「국사대사전」백만사, 1974년 관》

④ 단군 천부경은 신지가 전자(篆字)로 옛 비석에 쓰고, 최문창후 고운이 그 글자를 풀어 태백산에 새겼다. 《김영의(金永毅), 『천부경 주해(天符經註解)』》

⑤ 창힐이 처음 문자를 제작하였다고 중국에서 말하는데, 그는 동국(東國)사람이라 하고, 그리고 단군시대의 신지(神誌)의 문자가 지금도 남아 있어, 이 책의 상면(上面)에 영인하여 붙인 것도 있어서, 문자가 있고 예의를 아는 것이 단군고족(檀君古族)으로 되었은즉‥‥‥《『영변지(寧邊誌)』, 71년판, PP.126-l27》

⑥ 한말(한말) 학자였던 계연수(桂延壽)가 1916년 9월 9일 묘향산 깊은 계곡의 석벽에서 천부경임을 알고 한 벌을 탁본하여 서울 단군교당으로 보냄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계연수의 서신문(書信文)》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볼 때, 몇 가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1) 전고비문과 녹도문은 서로 같은 글자를 말하는가?

2) 최고운의 81자는 전고문을 단순 번역한 것인가, 아니면 전혀 별개의 제2창작을 하였는가?

3) 전고비문(또는 녹도문)의 판본은 여러 개인가?

 

2. 몇 가지 전고비문의 탁본들

 

앞에서 지적한 몇 가지 의문점에 대하여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현 단계에서의 한계점을 감안하여 필자는 두 가지 가정 하에 즉, ①「천부경의 원문(16자)은 녹도문으로 쓰여졌으며, 그것은 전고비문과 일치한다. 」, ②「천부경(16자)과 최치원의 81자 경문은 별개의 독립된 글이다. 」는 전제 하에 이 글을 계속하고자 한다.

고문(고문)에 상당히 권위 있는 학자로 알려져 있는 허목(I595~1682 숙종 시대의 우의정)의 대표적 문집인 『기언(記言)』(古文편, 제6권)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먼 옛날 창힐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 처음으로 글자를 만들어 조적서(鳥跡書)를 지었고, 신농씨는 수서(穗書)를, 황제씨는 운서(雲書)를, 전욱씨는 과두문자를, 무광은 해서를 각각 만들었다. 또 기자의 고문이 있으나 너무 오랜 것이어서 알기가 어려웠는데, 한(漢)의 양웅(楊雄)이 이것을 알아보았다‥‥‥‥」 《민추회, 『미수기언 I』, 1986년 판》

이상의 내용만을 참고할 때, 창힐의 조적서와 신지의 녹도문이 서로 같은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조선 후기의 인물로 알려진 김두영(金斗榮)의 『전첩 (篆帖』(출전 : 충남 향토연구회 발간, 『향토연구 제7집』, 90년 8월)에 창힐의 조적서로 알려진 서체(그림 2)가 발견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녹도문과의 어떤 상관성을 규명할 수가 없으므로, 오늘날 알려진 16자 전고비문이 곧 천부경의 녹도문으로 보고, 그 동안 세상에 공개되어온 몇 가지 전고비문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 그림 2 > 김두영 「전첩」

 

  1) 안영태(安永泰), 『현대정치철학(現代政治哲學』, 공동문화사, 1974년 판

 

안씨는 자신의 저서 속표지마다 이 그림(그림3)을 싣고 있다. 그는 이것을 「神誌氏의 전자(篆字)로 단군시대(4,500년 전)의 기록」이라고 밝혔다.(心溪 鄭周永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안씨는 옛 황실재산관리소장인 尹宇景이 소장했던 것을 받아서 등재한 것이라고 함)

 

2) 송호수(宋鎬洙), 『겨레얼 3대 원전(元典)』, 도덕성회, 단기 4316년 판

김붕남(金鵬南), 『백두산(白頭山)은 우리 고향(故鄕)』, 평화사(平和社), 4324년 판

 

이 두 책 속(그림4)에는 『영변군지』(1942년 발간본)에 실려 있는 모사본이

똑같이 인용되었다. (김씨에 의하면, 이 자료는 미국에 살고 있는 전진 언론인인 홍흥수씨가 1983년 묘향산을 방문하였을 때, 묘향산 역사박물관장 최형민씨로부터 얻었다고 함)

 

 

3) 『영변지』, 1971년 판

 

앞항에서 언급한 『연변군지』의 최초 발간은 1942년(그림5-1)으로 「81자 神誌篆」과 「16자 神誌篆」이 함께 있으며, 그 후 월남한 세대들에 의해 1971년(그림5-2)에 서울에서 이 책이 재발간(원본은 한문이 많이 섞여 있으나, 이 책은 한글 번역이 눈에 띈다)되었는데, 여기에는 「神誌筆蹟」이란 이름으로 맨 앞장에 실려 있다.

 

 

 

 

   

4) 이유립 『대배달민족사(1)』, 고려가, 1987년 판

 

이 분야의 권위 있는 학자였던 이유립 씨는 이 글자(그림6)를 「법수교고비(法首橋古碑()(평양소재)라고만 밝혔을 뿐,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이 법수교에 대하여 16세기 말에 편찬된 《평양지》에서는 「평양법수교 다리에 옛 비가 있었는데, 그 글자가 우리 글자(훈민정음)도 아니고 인도의 범자도 아니며, 중국의 전자도 아니라고 하면서 혹 말하기를 이것은 단군 때의 신지가 쓴 것이라고 하였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 없어졌다」고 했으며, 「법수교에는 선인이 내왕하였다. 법수(法首)는 선인의 이름이다.」(『태백일사』「마한세가 上」)라는 자료에 근거하여 법수교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겠다.(앞 단락 ③항의 이홍직(李弘稙)의 글 참조)

 

이상의 네 가지 자료에 거의 같게 나타나고 있는 이 전고비문을 필자로서는 일단 「천부경」원문(16자)으로 보고자 한다. 다시 말하지만 一始無始一로 ?諛′求? 최치원의 81자 경문과의 연계를 반대하며, 다음 항에서의 논의를 위해 이 네 자료를 「16자 전고문」으로 통칭하고자 한다. <그림7>은 이 네 자료에 기초하여 하나로 통일하여 배열한 것이다.

 

3. 두 개의 또 다른 전고비문의 발견

 

앞에서 언급한 네 가지 모사본(16자 전고문)의 전고비문은 배열의 순서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낱 글자들은 서로 비료해 보면 똑 같은 판본(모두 16자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런 이유로 「16자 전고문」으로 통칭한 것임)

 

그런데 필자는 이 「16자 전고문」과는 전혀 다른 탁본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와 서로 같은 고전자(古篆字)라는 면에서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항을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김규진(金圭鎭), 『서법진결(書法眞訣)』, 고금서화진열관, 1915년 판

 

필자는 이 책을 대전의 어느 고서점에서 구입하였다. 해강(海岡, 김규진의 호 : 1868~1933)은 영친왕의 스승을 역임할 정도로 서예의 대가였으며, 지금도 주요 사찰(필자는 가야산 해인사에서 해강의 필적을 확인하였다)의 현판에서 그의 글씨를 발견할 수 있다.

『서법진결(書法眞訣)』은 일종의 한자서예 입문서로서 기초에서 최고급서체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고문서체로 「창힐전」, 「하우씨전」… 등 7가지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문제의 서체는 바로 창힐전(그림8)이라는 이름아래 쓰여져 있는 11자의 고문(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朴弘來 저, 『금역진리(金易眞理)』참조)인 것이다.(이하 이를 「11자 전고문」이라고 통칭하고자 함)

 

2) 백수현(白水縣) 사관촌(史官村) 창성묘(倉聖廟)의 『창성조적서비(倉聖鳥跡書碑)』

 

이 창성(倉聖)의 조적서비문은 본래 『섬서고대서법유적종술(陝西古代書法遺蹟綜述)(1)』에 실려 있는 것을 『환단지(桓檀誌)』제10호(1993년 6월 6일 발간)에서 재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이 전고비문(그림9)은 모두 28자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이하 「28자 전고문」이라고 통칭함)

 

 

   

4. 세 전고문의 차이점 분석

 

필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논의의 편의를 위하여 남한 내에 널리 퍼져 있는 천부경 원문들을 하나로 정리하여 「16자 전고문」이라 했고, 해강 김규진의 판본을 「11자 전고문」, 도 백수현의 조적비를 「28자 전고문」이로고 통칭하였다.

우선 세 전고문의 전래과정이 가장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16자 전고문」 가운데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본자료는 1942년 판 『연변군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에 의하면 최치원의 81자 경문이 계연수에 의해 1917년(일설에는 1916년)에 묘향산에서 채약 중에 발견되었으며, 「16자 전고문」은 다른 책(他本)에 있는 것을 옮겨다가 「단군천부경팔십일자신지전」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실었다는 것이다. 또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 상고할 길이 없으나, 윤우경씨로부터 받았다는 안영태씨의 판본을 참고한다면 한말(韓末)에 확인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둘째, 「11자 전고문」의 경우, 해강은 그 책을 1915년에 쓰고 1933년에 서거하였기 때문에 『영변군지』의 구독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해강이 18세(1886년)에 중국에 들어가 명승지를 둘러보고, 서화집들을 두루 열람하였다느 기록(서법진결의 序)과 영친왕의 스승이었던 그가 궁중의 각종 서적을 탐독했을 가능성 등에 더 깊은 연구가 요구된다 하겠다.

만약 해강이 중국에 가서 「28자 전고문」을 보았든지, 아니면 궁중에서 윤우경이 소자했던 것과 같은 판본(16자 전고문)을 보았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겠으나, 「28자 전고문」과 「16자 전고문」에 전혀 없는 글자가 「11자 전고문」 속에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셋째, 백수현의 「28자 전고문」의 발견 및 전래과정에 대하여 필자로서는 아직 구체적인 언급을 할 수가 없어 유감이다.(『환단지』 발행인인 김성준(金成俊)씨가 이 자료를 보관하고 있음)

아무튼 이상의 몇 가지 내용에 유의하여 3가지 전고문의 공통점과 상이점을 나름대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공통점>

먼저 공통점을 지적해보겠다.

① 이 3가지 전고문이 하나의 동일한 주제(예를 들어 천부경)를 16자, 28자, 11자로 다리 표기한 것이라는 전제를 할 수는 없지만, 일단 글자의 꼴을 중심으로 관찰할 때, 「16자 건고문」과 「11자 전고문」사이에 같은 모양의 글자꼴이 7개 있으며( ), ② 「16자 전고문」과 「28자 전고문」 사이에는 놀랍게도 「28자 전고문」속에 「16자 전고문」이 그대로 다 들어 있다.( 를 같은 것으로 보았음), ③ 「28자 전고문」과 「11자 전고문」사이에 같은 글자는 8자( )가 있다. 따라서 이 3가지 전고문의 공통글자는 아펭 지적한 7글자이다.

④ 이 3가지 전고문이 동일한 주제를 서술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서로 전혀 다른 경로과정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체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면에서 옛 우리 조상들의 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⑤ 이 3가지 전고문을 자세이 보면, 모두 세로쓰기로 되어 있다.

 

<상이점>

그 다음 상이점을 지적해보겠다.

① 각각의 낱글자가 16자, 11자, 28자이다.

② 「16자 전고문」과 「11자 전고문」은 국내자료에서 발견되었으나 「28자 전고문」은 중국에서 발견되었다.

③ 「16자 전고문」은 신지의 녹도문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왓으나, 「11자 전고문」과 「28자 전고문」은 「창일전」으로 전하고 있다.

④ 「16자 전고문」의 글자는 「28자 전고문」안에 다 들어 있으나, 「11자 전고문」과 비교할 때 「16자 전고문」에는 4개( ) 글자가 없으며, 이 4개 글자 중에 3개( )는 「28자 전고문」 안에도 들어 있지 않는 점에 유의할 때 해강의 「11자 전고문」의 독특성이 돋보인다.

⑤ 「16자 전고문」과 「11자 전고문」에 모두 없고, 오직 「28자 전고문」 안에만 있는 글자는 10개( )이다.

 

 

5. 결론

 

이상에서 필자는 일단 「16자 전고문」을 중심으로 나머지 「11자 전고문」과 「28자 전고문」을 비교하는 것에 그쳤다.

최근 북한의 柳烈교수(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는 「이 신지글자 16자는 단군시기부터 고조선에서 쓰인 우리민족 고유의 글자」임이 명백하다고 말하고,이 신지글자는 「뜻글자가 아니라 소리글자」로서 「고조선 시기의 토기 밑굽」에도 이와 같거나 비슷한 글자(그림10)들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림10> 필자가 발췌한 자료임)

 

오늘날 대부분의 천부경 연구자들이 「16자 전고문」을 진지한 방법으로 분석도 하기 전에 무조건 고운 최치원의 81자 경문과 연계시키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16자 전고문」을 「16자 천부경」으로 전제할 때 이 「16자 천부경」에 대한 연구는 필자가 이 글에서 제시한 「과 「28자 전고문」과의 비료연구(가능하면 해독까지)를 통해 그 진의가 규며오디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민족상고사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닌 『환단고기』 속에 81자 경문만 전하고, 이 16자 천부경이 전하지 않는 점을 내 아쉽게 생각한다.

차제에 필자의 견해를 덧붙인다면, 최치원의 81자 천부경(天符經)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16자 전고문」과 구별되는 최치원의 독창적인 경문(經文), 즉 천부경에 대(對)가 된다는 의미로서 감히 이름붙여 인부경(졸저, 『인부경 81자 집주(人符經八十一字集註)』 참조)이라고 칭하고 이해함이 어떨까 생각해본다.

끝으로 앞에서 열거한 「16자 전고문」「28자 전고문」을 모두 4~5천년 전에 고대의 우리 민족이 사용한 옛글자라고 이해할 때 오늘날 우리는 서로 다른 모양으로 된 신지 녹도문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 기타 참고도서

이형구 「단군을 찾아서」(살림터 출판사), 1994년 판.

출처 : 비유와상징
글쓴이 : 올리비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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