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천임씨 종친회

풍천임씨 에 관한 자료

♧문화재 지킴이 2009. 6. 4. 08:30
豊川任氏에 관한 자료

氏族의 연원

시조는 任溫. 그는 中國 紹興府 慈溪縣에서 고려로 건너와 6세손 임주(任澍)에 이르기까지 황해도
豊川에서 내리 살게되면서 豊川任氏가 비롯됐다고 전해지나 후손들은 이들 선대가 꼭 中國人은
아니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豊川府 北朴達山 陶谷里에서 발견된 임도(任徒).임천유(任天裕)의 碑와 誌石, 慶州 佛國寺에 소장된
' 慶尙道先生案'에 任澍의 世系가 분명히 기록돼 있어 '中國渡來說'은 당상한 의아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고려 충렬왕 때 按察使를 지낸 任澍의 아들 임자송(任子松. 충렬왕조 侍中判三司事. 西河府院君),
임자순(任子順, 民部典書)대에서 伯派와 仲派로 나뉘면서 고루 인물을 배출, 번성하게 된다.

本貫地연혁

豊川은 본래 고구려의 仇乙縣인데 고려초에 豊州로 고쳤다. 성종 14년에 都護府로 승격하고
현종 9년에 防禦使를 두었다.
조선 대조 6년에 兵馬使로 知州事를 겸하게 하였고 태종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郡으로 하였다가
殷栗縣과 함께 豊栗郡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후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5년 군이 되었는데 그뒤 송옥군에 병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로 성씨로 任.盧.金.崔.洪씨 등이 있었다.

주요世居地와 변천

洪城에서 保寧을 지나 舒川으로 빠지는 길목 산기슭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마을. 충남 保寧郡 珠山面
金岩里가 대표적인 집성촌이다.
珠山面 소재지인 金岩里 앞쪽으로는 長項線이 가로놓여 있고 철길을 건너면 조개를 캘 수 있다는
산조개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옛날에는 이곳이 바다였던 것 같다.
金岩里를 중심으로 熊川.嵋山面 등 保寧 일대에 豊川任氏 1천3백여 가구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金岩里 2백여 가구 중 1백여 가구가 豊川任氏다.
豊川任氏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6백여 년 전. 고려 공민왕 말년 임자순(任子順)의 아들
임향(任珦)이 신돈(辛旽)에게 쫓겨 洪城 古丘島.竹島로 유배됐다가 귀양살이가 풀려 돌아가던 중
세상사가 싫어진데다
明德山 이름이 마음에 들어 주저앉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부터 豊川任氏는 이곳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며 6백여 년간 살고 있다.
金岩里에서 북동쪽으로 차량 1대가 겨우 지날만한 울퉁불퉁한 길을 4km쯤 가다보면 雲峰山과
明德山 사이에 조그마한 들판이 나타나고 앞에는 洋角山이 우뚝 서 길을 가로막는다.
이 들판이 바로 6백여 년간 임향(任珦)의 후손들을 키워온 젖줄이다.
작은 들판이지만 앞에는 花山川이 흘러 가뭄 걱정이 전혀 없다. 알맞게 기름진 옥토다.

洋角山 중턱 東幕洞입구에는 임향(任珦)의 일생을 기록한 神道碑가 서 있다. 1백여년 전 건립된
것으로 매년 10월 1일 享祀를 지내고 있다.
또 神道碑에서 2백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豊川任氏 재실이 있다.
金岩里는 학문을 좋아하는 豊川任氏의 가풍을 답습한듯 높은 교육열이 특징이다.
面소재지로는 보기 드물게 日帝 때부터 중학교가 세워져 이 일대에서 전대법원 판사
임항준(任恒準)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는 기반이 됐다.
해방 후에는 농업고등학교까지 세워져 인근 들판을 기름지게 가꾸는 일꾼들을 양성하고 있다.


氏族史의 개요

四溟堂 惟政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그의 성이 豊川任氏라는 것을 아는 이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처럼 世人에게 실제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리학의 대가 鹿門 임성주(任聖周)형제와
임헌회(任憲晦)등 수많은 巨儒.석학을 배출한 집안이 바로 豊川任氏다.
조선조에 相臣 2명(右議政 任방, 右議政 任百經), 문과급제자 1백44명을 배출한 豊川任氏는
성종~연산군대에 임사홍(任士洪)부자가 잠시 전횡한 것을 빼고는 주로 선조 이후의 조선후반기에
세력을 떨쳤으며 벼슬보다는 학문을 숭상하는 이가 많았다.

任士洪일가의 사건으로 豊川任氏는 다소 명예가 손상된 느낌이지만 그뒤 임자송(任子松)의 7대손인
竹崖(죽애) 임열(任說,문정공文靖公)의 후손과 任子順의 5대손인 四溟堂을 비롯, 6대손
임유겸(任由謙, 소간공昭簡公) 임유손(任由遜, 監察) 형제의 후손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와
任士洪일가의 허물을 덮고도 남음이 있었다.
중파 시원인 任子順은 임향(任珦) 임진(任瑨).등 두 아들을 두었는데 任珦의 현손 任應奎가
바로 전설적 인물인 四溟堂이다.
그는 西山大師의 으뜸제자로서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홀연히 승복을 벗고 의병장으로 나서
수많은 적을 무찔렀고 日本에 건너가 德川家康과 담판, 인질로 잡혀간 3천5백여명의 동포를
구출하기도 했다.
또 洪景來亂 때 博川郡守로 포로가 돼 갖은 고문과 회유에도 불구, 굽히지 않은 불굴의 선비
임성고(任聖皐)와 그의 아들 임태영(任泰瑛), 한말의 의병장 임철준(任哲準)등은 모두
四溟堂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호국정신을 몸으로 실천한 인물이다.
任溫의 13세손 중파 任由謙은 工曹.戶曹判書와 京畿道觀察使.漢城判尹을 두루 지낸 權臣이다.
그의 직계 임추(任樞).임권(任權).임병(任柄).임건(任楗).임간(任幹)등 다섯아들, 임호신(任虎臣).
임보신(任輔臣). 임중신(任重臣).임수신(任壽臣).임례신(任禮臣)등 손자, 증손 任광등 후예들이
모두 높은 벼슬을 해 豊川任氏의 가문을 빛냈다.
任由謙의 동생 任由遜의 가계도 임현(任鉉).임전(任典).임홍망(任弘望).임태춘(任泰春) 등 석학과
문장가가 끊이질 않았으며 19 세기후반 성리학의 대가 임헌회(任憲晦)가 학자로서 크게 돋보였다.

임명필(任明弼)의 세아들 임윤(任尹).임열(任說).임여(任呂) 3형제에서 비롯되는 학풍은
임성주(任聖周)형제, 任憲晦에 이르러 극치를 이뤘으며 士林을 풍미하게 된다.
任尹의 아들로 領議政을 추증받은 임국로(任國老)의 아들 임몽정(任蒙正)은 大司成을 지냈고
그의 조카 임유후(任有後)는 都承旨로 '萬休堂集'이란 명저를 남겼다.
任說(명종조 漢城判尹)의 후손 임숙영(任叔英.인조조.持平), 임의백(任義伯.효종조.工曹參判),
任방(경정조.右議政), 임승(任陞) 등도 학문 또는 벼슬로 유명했다.
특히 任義伯의 현손 임성주(任聖周).임정주(任靖周) 형제는 任씨가 낳은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任聖周(숙종 27년~정조 12년)는 栗谷의 학풍을 이은 主氣철학의 거봉이다.
경학과 성리학을 규합해 主氣論을 확립하고 '鹿門集'을 남겼으며 조선 성리학 6대가의 하나로
손꼽힌다. 任靖周는 정조의 스승으로 정치.경제.군사.역사를 강론했으며 정조가 "당대의 碩儒로
靖周뿐"이라고 칭찬했을 정도였다 한다.
鹿門 任聖周의 누이 允摯堂 任씨는 여류학자로 유명하다.
한편 17세기후반 任說의 증손 南谷 임한백(任翰伯)은 인조~현종대에 8문장의 하나로 손꼽혔으며
漢城附判尹 임상원(任相元)도 당대의 대문장가였다.
임시척(任時倜)의 자는 大哉이다.
숙종 45년 武科에 급제하고, 摠戎廳에서 7年間 복무하다가 試射 때 특출한 솜씨를 보여 通政大夫에
올랐다.
영조 4년 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후 機張縣監.昆陽郡守를
역임하고, 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가 忠淸道水軍節度使로 부임하여 戰船을 만들고 성을 구축하는
등 군비확장에 노력했다.


임성고(任聖皐)의 字는 仲岸, 號는 偶然翁이다.
정조 19년 武科에 급제하고, 순조 11년 洪景來의 난 때 博川郡守로 포로가 되어 印符를 빼앗기고
항복을 강요당했으나 갖은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이를 거절하여 100여 일간 구금되었다.
난이 평정된 뒤 그 충절을 표창받고 訓鍊大將.御營使.禁衛大將.摠戎使등 요직을 역임하고,
刑曹判書에 이르렀다.

任允摯堂의 호는 允摯堂이며 女流文人이다.
임적(任適)의 딸로 申光裕의 부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性理學에 통달했다. 정조 20년 동생
任靖周와 시동생 申光祐가 遺稿를 정리하여 <允摯堂遺稿> 2卷을 간행했다.

임사경(任思敬)의 字는 女直으로 學者이다.
숙종 42년 스승 윤증(尹拯)이 화를 입자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심하여 <三墳><五典>을 깊이
연구했다.
뒤에 學行으로 추천되어 光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世子翊衛司副率로서 書筵官이 되었다.
詩文과 <史記>에 밝았고, 星曆.度數.兵機.吏治 등에도 정통했다.

임정(任珽)의 字가 聖方이다.
景宗 3년 增廣文科에 급제하고, 史官에 뽑혔다가 영조 4년 持平이 되었다. 그후 校理.修撰등 여러
淸宦職을 거친뒤 進賀겸進香使의 書狀官으로 淸나라에 다녀왔다. 應敎.執義를 지낸 뒤 다음해
文科重試에 乙科로 급제하고, 同副承旨를 거쳐 大司諫에 올랐다. 그후 右副承旨.吏曹參議.大司諫을
역임했고, 大司成이 되었다.
詩歌에 통달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임성주의 자는 중사, 호는 녹문으로 학자이다.
영조 9년 司馬試에 합격하고, 世子翊衛司洗馬를 거쳐 侍直을 지내고 公州의 鹿門에 은거했다.
정조가 즉위하자 불리어 東宮을 輔導하고 뒤에 地方官을 지내다가 다시 鹿門에 은거하여 學問으로 여생을 보냈다.
朝鮮 性理學 6大家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진다.

任靖周의 號는 雲湖, 謚號는 文敬, 學者이다.
영조 38년 司馬試에 합격하고, 童蒙敎官을 거쳐 侍直을 지내고, 書筵官으로서 世孫(正祖)을 보필하여 學問을 강론했다.
뒤에 정조가 즉위한 뒤 司饔院主簿.溫陵令.淸山縣監 등을 역임했다. 兄인 任聖周의 學問을 이어받아 性理學에 조회가 깊었다.

임상원은 자가 공보이다.
현종 6년 別試文科에 장원하고, 司書를 거쳐 숙종 5년에 淸風府使로 있을 때 文科重試에 丙科로
급제했다.
이어 大司諫이 되고, 冬至副使로 淸나라에 다녀와서 弘文館.藝文館提學을 거쳐 都承旨를 지내고,
工曹.刑曹判書, 右參贊.漢城府判尹.左參贊 등을 역임했다. 孝文이라 謚號되었다.

임수간(任守幹)의 字는 用譽이다.
숙종 20년 謁聖文科에 급제하고, 正言.敎理.副修撰을 역임했다. 이어 文科重試에 급제하고, 檢討官.
修撰을 거쳐 賜暇讀書를 했다. 뒤에 通信副使로 日本에 갔다가 다음해 귀국, 右副承旨를 지내고,
右承旨가 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經史에 밝았으며, 音律.算數.兵法.地理에도 정통했다. 吏曹參判에 追贈되었다.

임한백(任翰伯)의 號는 南谷이다.
인조 20년 式年文科에 장원하고, 持平.正言등을 거쳐 司書로서 昭顯世子가 瀋陽에 볼모로 갈 때
陪從했다.
다음해 돌아와 知製敎가 되고, 그후 修撰을 거쳐 校理로서 春秋館事官을 겸임하여 孝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뒤에 吉州牧使로 나갔다. 詩文에 뛰어나 8文章의 한사람으로 꼽혔다.



임홍망(任弘望)의 字는 德章, 號는 竹室이다.
현종 7년 別試文科에 급제하고, 承文院을 거쳐 持平.正言을 지냈으며 숙종 1년에 南人에 의해
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庚申大黜陟 후에 兵曹參知.承旨.禮曹參議.黃海道觀察使.戶曹參議.忠淸道觀察使를 역임하고,
陳慰使로 淸나라에 다녀왔다.
兵曹參議.刑曹參判을 거쳐 同知中樞事로 耆老所에 들어갔다. 文章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經史에
밝았다. 謚號는 孝貞이다.

任방은 字가 大仲, 號는 水村이며, 文僖라 謚號된 분이다.
進士試에 합격한 후 현종 12년 昌陵參奉이 되고, 內外職을 거쳐 숙종 15년 戶曹正郞이 되었으나
己巳換局으로 仁顯王后가 폐위되고 송시열(宋時烈)이 유배되자 사직했다.
그뒤 仁顯王后가 復位된 후 軍資監正.丹陽郡守.司饔院僉正 등을 역임하고,
63세로 謁聖文科에 급제하여 掌令이 되고, 그후 大司成.承旨 등을 거쳐 工曹判書가 되었다.
경종 1년 右參贊에 승진했으나 辛壬士禍로 유배되었다.

임노(任魯)의 字는 得汝, 號는 潁西居士이며 學者이다.
학문에 전심하여 여러번 관직에 가용되었으나 불응하다가 순조 9년 濟用監副奉事가 되었고,
尙瑞院直長.司僕寺主簿. 義禁府都事 등을 거쳐 新寧縣監.忠原縣監 등을 지내면서 간악한 胥吏들을
숙청하고 土班의 횡포를 억제하여 질서를 바로잡았다. 任聖周의 門人으로 그의 主氣論을 계승했다.

任百經의 字는 文卿이며 文貞이라 謚號되었다.
순조 27년 增廣文科에 급제하고, 헌종 5년 忠淸左道暗行御史가 되었다. 뒤에 弘文館.藝文館의
提學을 역임하고, 철종 7년에 大司成을 거쳐 刑曹判書에 올랐다. 그후 水原府留守를 지내고,
謝恩使로 淸나라에 다녀와 고종 1년에 右議政에 올랐다.

임헌회(任憲晦)의 字는 明老, 號는 鼓山 謚號는 文敬이며 學者이다.
일찌기 經書 공부에 전심, 학자로서의 명성이 알려져 철종 9년에 천거로 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뒤에 經筵官.吏曹參議 등을 지내고 고종 11년에 大司憲을 거쳐 祭酒가 되었다. 性理學에 밝았다.

임헌찬(任憲瓚)은 韓末의 學者로 字는 玉汝이며 號는 敬石이다.
聽明이 출중하여 田愚 門下에서 修業, 經書에 精進하였다. 李滉.李珥 등 先賢의 正統을 繼承,
韓日合邦이 되자 憤慨하고 山中으로 들어가 後進養成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