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지킴이

[스크랩] 유배길의 숙식은 누가 부담했을까?

♧문화재 지킴이 2009. 10. 8. 16:15
 

  

 

 

 

                                                                                                                      대검찰청 이 현 정 연구사

 

 

“소달구지가 끄는 나무형틀 속에 상처투성이 얼굴로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오랏줄에 꽁꽁 묶인 죄인. 뙤약볕 속에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뒤로 하며, 주위에는 중무장한 관리와 포졸들의 삼엄한 감시의 눈길 속에 어디론가 멀리 떠나가는 모습...”

 

여러분들께서는 ‘유배’라고 하면 아마도 영화나 사극에서 보아왔던 이러한 장면을 떠올리실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모습은 조선시대 유배 중에서도 극히 예외적인 것이었고, 조선시대 관리들의 유배길은 대부분 그렇게 절박하거나 처절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유배의 정의와 그 주대상자에 대해 알아볼까요?

 

우선 유배(流配)란 죄인을 벌하는 조선시대 다섯 가지 형벌(태·장·도·유·사형) 중 하나로서 중죄를 범한 자에게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멀리 추방하여 종신토록 귀환하지 못하게 하는 형벌을 말합니다. 유배는 주로 모반이나 반란을 꾀한 자, 정부 정책을 비판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산 자, 권력 다툼에 밀려난 자 등 주로 정치적 사건에 관련된 관리들이 그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일반 사건에 있어서도 사형에 처해야 할 중죄인을 유배형으로 감형시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국왕이 재위기간 중 사형수를 많이 배출하지 않아야 성군(聖君)임을 인정받는 조선 유교사회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드라마 '이산' 중 - 유배가는 모습

 

유배를 ‘귀향(歸鄕)살이’라고도 하는데,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까닭은 고려시대에는 죄를 지은 관리를 자신의 고향으로 돌려보내, 다시는 중앙정치 무대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귀향이 너무 편한 형벌이라는 인식 때문에, 죄인을 주로 연고지가 없는 타향(他鄕)으로 보내는 것으로 벌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유배지는 죄의 경중(輕重)이나 죄인의 신분에 따라 그 거리를 달리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의 대명률(大明律)를 참조하여, 각각 2천리, 2천 5백리, 3천리, 이렇게 세 종류의 유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영토가 넓은 중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중국에 비해 영토가 작았던 조선에서는 그대로 적용시키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조선초기에는 이 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이곳저곳을 거치면서 죄인을 동서남북으로 빙빙 돌려가며 이 정해진 거리 수를 채우기도 했지요. 이러한 폐단이 있자 세종대왕은 형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선 실정에 맞게 이 거리를 조정하여 600리, 750리, 900리로 개선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관리는 왕의 노여움을 사 이전처럼 3천리를 다 채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네요.

 

유배지는 누가, 어떠한 절차를 거쳐서 정했을까요?

 

일단, 죄인이 관직에 있는 경우는 의금부에서, 관직이 없는 경우는 형조에서 죄의 경중에 따라 유배지를 결정하였습니다. 이들 해당관청에서 결정한 유배지에 대해 국왕의 윤허를 받으면 유배지가 최종 확정되었지요. 그런데 조선 정부는 유배지로 가는 경로나 하루에 가야할 거리, 최종 목적지까지 걸리는 날짜까지도 법으로 정해놓을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예를 들어, 의금부 노정기를 보면 유배지는 총 336개 고을로서, 가장 짧게는 30리 반나절 걸리는 경기도부터 가장 길게는 2090리 24일 반나절 걸리는 함경도까지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조선 팔도 전체가 유배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유배에도 단계와 차별이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  일단 유배가 중앙 정치무대로부터 멀리 격리되어 각종 정치참여나 사회활동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국왕이 있는 한양과 유배지와의 거리는 물론이고, 유배지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가의 여부, 유배지가 내륙이냐 섬이냐 등에 따라 단계와 차별이 있었습니다. 일단 가장 가혹한 유배형은 위리안치(圍籬安置)였습니다. 이는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 유배지의 처소둘레에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죄인을 가두는 형벌로서 유배지에서 자유로운 활동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섬으로 가는 유배가 그 다음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섬 지역은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은 곳이 많았고, 여러 사람들과의 교류도 지리적으로 어려웠으며, 또 배를 타고 섬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날 수도 있어 매우 위험한 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섬으로 가는 유배는 부담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내륙 지방, 그것도 처가나 외가 등 자신의 연고지로 유배를 떠나는 것이 그 나마 좋은 대접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외가가 있던 전남 해남으로 유배를 떠났으므로 비교적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실제 조선시대 관리의 유배길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 명종 때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를 떠나게 된 이조좌랑 이문건은 자신의 유배생활을 자신의 문집인 [묵재일기(?齋日記)]에 남겼습니다. 이 일기에 근거할 때 이문건은 당시 정3품 당상관이었기 때문에 압송규정에 의거하여 유배지까지 데리고 갈 압송책임관으로 의금부 서리 최세홍을 배정받았습니다. 최세홍은 이문건의 집을 찾아 죄인의 유배지를 적은 문서인 배소단자(配所單子)를 보여주며 그의 유배지가 경상도 성주임을 알려주고 바로 그 다음날 출발해달라고 재촉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문건은 압송관 최세홍에게 다음과 같이 대접을 합니다.

 
“술을 거하게 대접하고 또한 그에게 갓모자, 목면, 솜고도, 흰 가죽신, 분투, 귀마개, 비옷용 베옷 등을 주었는데 그의 요구가 너무 많아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 당시 유배죄인은 압송관의 경비도 제공해야 했습니다. 이를 부비채(浮費債)라고 했는데, 위의 경우처럼 압송관이 떠나기 전에 유배죄인에게 물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압송관에 대한 수고비이자, 유배길 도중 죄인이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압송관이 베푸는 갖가지 편의에 대한 대가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문건은 유배길에 가족을 데리고 갈 수 있었을까요?

 

조선 정부는 위리안치를 제외하고는 유배죄인의 가족을 데려가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족이 동행할 경우 유배길이 힘들어지고, 또 죄인으로서 국왕에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유배죄인이 일부러 가족을 동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문건도 이와 같은 생각에서 가족들을 동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는 고위 관리였기 때문에 국가에서 마패가 나와 말을 타고 유배지까지 갈 수 있었고, 노비도 데려갈 수 있었습니다. 즉 이 문건은 소달구지가 끄는 나무형틀 속에 묶인 채로 앉아 고통스럽게 유배길에 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점은 영화나 사극에서 보아왔던 유배에 대한 장면이 현실과 다른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우리를 더 당황하게 만드는 사실은 압송관이 유배죄인과 동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문건은 고위 관리를 지냈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유배를 떠나지만 국왕의 마음이 바뀌거나 정치적 상황에 변동이 있다면 언제든지 다시 한양으로 올라올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이렇듯 정치적 재기를 도모하고 있던 이문건의 입장에서는 유배길 도중의 도망이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도주의 우려가 없는 경우에는 압송관은 유배죄인과 중간 약속장소에서 만나거나 심지어 유배 목적지에서 만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문건도 압송관 최세홍과 동행하지 않았으며, 중간 경유지인 괴산에서 만날 약속을 하였고, 또 실제로 그 곳에서 약속한 날짜에 만납니다.

 

 

 

[조선시대 남원의 감옥]

 

 

그렇다면 유배길의 숙식은 누가 부담했을까요?

 

원래는 유배죄인이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유배도중 경유지의 수령이 소문을 듣고 마중을 나와 숙식을 제공하거나, 심지어 고액의 경비까지 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를 ‘행자(行資)’라고 하는데 이는 중앙의 고위관리였던 유배죄인이 다시 중앙정계로 복귀할 것을 예상하여 미리 뇌물로 주는 경비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조선 정부에서는 신속한 유배를 집행하기 위하여 유배지역의 경로와 하루에 가야할 거리, 도착해야 하는 날짜를 엄격히 규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문건은 이를 정확히 지켰을까요? 그는 유배를 떠난 지 나흘째 되는 날 한양에서 340리 떨어진 충북 괴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는 하루 평균 85리를 지나온 셈인데, 경상도 유배지에 갈 경우 하루에 88리를 가게 되어 있던 규정과 비교해볼 때, 압송관의 동행 없이도 거의 규정대로 유배길을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괴산에서 생깁니다. 괴산은 이문건의 처갓집이 있는 곳이었기에, 돌아가신 장인의 묘소에 들러 성묘도 하고, 또 그 지방 관리나 친지들도 오랜만에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통에 이곳에서 사흘을 지체합니다. 하지만 이는 이문건 만의 특별한 사정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 유배를 떠나는 다른 관리들의 경우를 보아도 조상에 대한 성묘나 경유지 지방 문사와의 교류 등으로 시간을 지체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조선 정부도 이러한 이유로 규정된 도착일자를 며칠 정도 어기더라도 비교적 관대하게 처벌하였습니다.

 

한편 이문건은 처가가 있던 괴산에서 사흘을 지체한 후 괴산 처가에서 준 노비를 더 데리고 유배길에 올라, 예정보다 사흘 늦은 11일 만에 경상도 성주 유배지에 도착합니다. 만일 괴산 처가에서 사흘을 머무르지 않았다면 정해진 날짜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조선시대 고위관리에게 유배길이란 먼 길을 가야함으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정치참여의 기회를 빼앗기고 혼자 버려졌다는 박탈감이라든지, 과연 내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시대 많은 관리들이 이 불안감을 넘어서 다시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지만, 불행히도 이문건에게는 이러한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상도 성주에서 23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중앙정계로 돌아오지 못하고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사극이나 영화에서 보던 유배 장면과 실제 역사 속에서 유배의 실상은 많이 다르죠? ^^;;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알고는 있지만 다르게 알고 있는 조선시대 관리의 유배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출처 : 검토리가 본 검찰이야기
글쓴이 : 검토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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