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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곡한 대나무 숲 사이로 아련한 풍경이 보인다. 시원한 폭포수 사이로 보이는 작은 집에서 일생동안 학문을 연구한 임윤지당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오보환 작가는 임윤지당의 삶과 정신을 대쪽같은 대나무와 맑은 자연 풍경 속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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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자식 잃고 비운의 한평생 아녀자 도리 다하며 학문 전념 겉으로 학식 드러내는 일 없어 고결한 정신 후대에 널리 칭송
"비록 부인의 몸이기는 하나 하늘에서 받은 성품은 애당초 남녀의 차이가 없습니다. 성인을 따르는 뜻은 매우 간절합니다."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 中)
인간과 만물의 근본을 성찰하는 학문 '성리학'은 조선시대 남성만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뭇 남성 못지않은 깊은 조예와 학식을 갖춘 여성 성리학자가 있었다. 바로 임윤지당(任允摯堂·1721-1793)이다. 그녀는 한평생 성리학을 연구해 우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심오한 원리를 체득했다. 뿐만 아니라 부단한 수양과 도덕적 실천으로 높은 인격을 갖춰 주변인과 후대에 칭송을 받았다.
윤지당은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한 성리학의 대가 녹문 임성주(鹿門 任聖周, 1711-1788)의 여동생이자 운호 임정주(雲湖 任靖周, 1727-1796)의 누나로, 당대 학맥으로는 최대 명문가 집안의 여성이었다. 그는 부친 임적(任適, 1685-1728)이 양성(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현감으로 부임하던 해에 태어나 다섯 살 때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1725년 함흥판관으로 전근 가는 부친을 따라 전 가족이 함경도로 이사 갔다가 2년 뒤 부친이 사직하자 서울에서 살았다. 다음해 부친이 병으로 작고하자 1729년 전 가족이 청주 근처의 옥화라는 산골마을로 이사했다.
윤지당은 이곳 청주에서 본격적으로 유교 경전과 역사책을 읽으며 학문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5남 2녀인 그의 형제들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가난하지만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학문과 예법을 익혔다.
총명한 윤지당은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았고, 이를 기특하게 여긴 둘째 오빠 임성주는 '효경', '열녀전', '소학', '사서' 등의 책을 직접 가르쳤다. 형제들은 때때로 어머니 곁에 모여 앉아 역사 속 인물에 대해 논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윤지당은 논리적이고 막힘없는 어조로 형제들을 놀라게 했다. 형제들은 "네가 대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며 탄식하곤 했다.
호인 '윤지당(允摯堂)'도 이무렵 임성주가 지어줬다. 윤지당이라는 호는 주자의 "태임과 태사를 존경하노라(允莘摯)"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태임(太任)과 태사(太女以)는 동양의 여성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여겼던 문왕의 어머니와 부인이다.
이렇게 재주를 타고나고도 뜻을 펼칠 수 없는 세상을 한탄하고 원망할 법 하지만,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역할을 충실히 행하면서 학문을 연마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동생 임정주는 '윤지당유고'를 통해 윤지당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빠른 말이나 황급한 거동이 없었고, 천성이 총명하고 영리하셨다. (중략) 낮에는 종일 여자의 일을 하고, 밤중이 되면 소리를 낮추어 책을 읽었다. 뜻이 목소리를 따르는 듯 하고, 정신이 책장을 뚫을 듯 했다. 그러나 학식을 깊이 감추어 비운 듯이 했기 때문에 친척들 중에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는 19세 되던 해, 강원도 원주의 선비 신광유(申光裕, 1722-1747)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혼인 후 얼마 만에 난산 끝에 자식을 낳았으나 아이는 죽었고, 설상가상으로 남편과도 사별하고 말았다. 남편도 자식도 없이 청상의 몸이 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그런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와병 중인 시어머니와 양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그는 남편 대신 시동생과 의논해 가사 일을 처리했으며 47세에는 이미 집안의 가장 어른이 되어 부녀자의 직분을 다하면서 가정을 화목하게 꾸려 칭송을 받았다.
시집와서도 모두가 잠드는 밤이 되면 존심양성(存心養性) 공부에 전념했다. 낮에는 문장에 관해 말하는 일 없이 아녀자의 일에만 전념하고, 밤이 깊으면 보자기에 싸두었던 경전을 꺼내 낮은 목소리로 읽었다. 이렇게 드러내 놓고 학문과 문장을 언급하지 않다가 만년에 돼서야 독서와 저술에 힘썼다.
윤지당의 학문의 경지가 얼마나 높았는지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윤지당이 오빠 임성주의 거처에 머물고 있을 때, 조카인 협과 흡 형제가 저녁문안 인사를 왔다.
윤지당이 "오늘 공부는 어떠하냐"고 물으니 이들은 "날이 더워 고통을 견딜 수 없어 부채질을 하며 달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윤지당은 "정신을 집중해 책을 읽으면 가슴 속에 자연히 서늘한 기운이 생기기 마련이다. 너희들이 아직도 입으로만 외는 헛된 염불을 벗어나지 못했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윤지당은 논(論)이나 설(說), 경의(經義) 등 학문적 이론에는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특이하게도 스스로 지은 시가 한편도 전해지지 않는다. 시를 지으면 감성만 자극될 뿐 성리학을 연구하고 실천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그의 소신 때문이었다. 윤지당의 학문적 관심은 어디까지나 성리(性理)와 도심(道心)의 추구, 또 존심양성(存心養性)과 그 실천에 집중됐다.
윤지당은 "부녀자들이 서적에 몰두하고 문장을 짓는데 노력하는 것은 법도에 크게 어긋난다"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소학'이나 '사서' 등의 책을 읽고 심신을 수양하는 자산으로 삼는다면 무방하다"고 말했다.
또한 "남자의 원리는 씩씩한 것이고, 여자의 원리는 유순한 것이니 각기 그에 따른 법칙이 있다"며 "천성대로 최선을 다해야 하며 부인으로 태어나서 태임과 태사의 도덕실천을 실천하지 않으면 이는 자포자기한 사람"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는 40세에 시동생의 아들 재준(在竣, 1760-1787)을 양자로 입양해 많은 사랑을 쏟아가며 길렀다. 그러나 윤지당의 나이 67세 때, 양자 또한 28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때 윤지당은 대단한 충격을 받아 비통한 심정 때문에 눈이 멀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73세에 세상을 떠났다.
윤지당은 세속적으로는 외롭고 박복한 삶을 살았지만, 이런 고난의 여정으로 인해 평생토록 학문의 기쁨을 알고, 저술에 몰두할 수 있었다. 조선의 여성성리학자 임윤지당! 그는 시대적 질곡과 불행의 삶속에서 떠오른 여성사의 큰 별이었다.
정민아 기자 mina@daejonilbo.com
도움말=문희순 배재대 강사·국문학 박사